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우광신 (문단 편집) === [[안직전쟁]]에서 [[2차 직봉전쟁]] === 1920년 장강상류총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우페이푸]]가 [[쉬수정]]과 [[취퉁펑]]의 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북상하자 2월 23일에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자오티]]를 대신하여 하남독군에 임명되어 우페이푸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7년이나 하남을 지배하던 하남독군 자오티가 강력하게 저항하는 통에 [[하남독군 교체 파동]]이 일어났다. 자오티는 군대를 집결시켜 오광신의 군대에 대한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한편 환계에 대항하는 8성 동맹에 가입했다. 돤치루이를 견제하고자 했던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무력을 써서라도 오광신의 하남독군 임명을 저지할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여기에 하남인들이 오광신이 그저 안휘군벌의 이익을 위해 하남의 민생을 방기할 것이라 여겨 오광신의 취임에 맹렬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1920년 2월 26일 오광신의 하남독군 임명안이 각의에서 통과되었음에도 대총통 [[쉬스창]]은 왕인천을 하남성장에 임명하는 것만 재가하고 오광신 임명안에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돤치루이는 화가 나 국무총리 [[진윈펑]]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별수가 없던 진윈펑은 2월 27일 하야하였다.[* 2월 29일, 쉬스창의 만류로 사직 반려.] 이후 돤치루이도 양보하여 오광신의 병력을 호북으로 회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20년 [[안직전쟁]]이 벌어지자 호북독군 왕잔위안과 싸우다가 [[장징야오]]와 함께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의 휘하 병력들은 패잔병이 되어 유랑하다가 대부분 토비가 되었다. 1921년 석방된 이후 [[봉천군벌]]에 몸을 의탁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때 봉군 6군단 부군장으로 참전했다. 베이징에 입성할 때 무려 4개 혼성여단을 추가로 신설하여 리징린과 함께 7만의 대군을 거느렸다. [[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의 하야에 공을 세운 [[펑위샹]], 손악, 호경익 등과 충돌을 빚었는데 [[리징린]], [[양위팅]], [[장쉐량]], [[장쭝창]], [[량훙즈]] 등과 회담을 하던 중 갑자기 손악을 욕하기도 했다. >"손악은 공산당원이다! 우리 모두 그 사람 조심해야 한다!" 이에 펑위샹이 농으로 대꾸했다. >"당신은 손악 형을 높게 보시는군. 손악 선생은 매일 커다란 시가를 두개나 피우는데 이러한 공산당원 말인가?" 펑위샹의 재치로 오광신의 도발에도 웃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의 연합은 이런 식으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924년 11월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자 육군총장, 육군훈련총감에 임명되었다. 1924년 11월 톈진회의에 참가해 2차 직봉전쟁 이후의 중국의 정세에 관해 논했고 1924년 12월의 톈진회의를 통해 강소독군 [[치셰위안]] 토벌을 논의했고 1925년 [[5.30 사건]]이 일어나자 남방에 파견되어 처리를 맡았는데 이때 [[쑨촨팡]]을 절강독판에 임명하여 남방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지만 신임 강소독판 [[양위팅]]의 안하무인의 행패와 [[봉천군벌]]의 지나친 확장에 불만을 품은 쑨촨팡이 1925년 [[손봉전쟁]]을 일으키면서 나가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