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궈전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국부천대 === 이후 한커우 시장에 임명되었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1939년 충칭 시장에 임명되었다. 1942년 외교부 정무차장에 임명되어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교부장 [[쑹쯔원]]을 대리하여 외교부의 전권을 행사하였다. 전쟁 승리 직전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승리 이후 상하이 시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상하이 시장 재직 시절 장제스의 [[재정경제긴급처분령]] 발효에 따라 경제독도보조원에 임명되어 화폐개혁을 하러 온 [[장징궈]]와 다투면서 장징궈와 사이가 나빠졌다. 장징궈는 경제부독도원을 설치하여 강압적으로 투기 상인들을 탄압하고 화폐개혁을 실시하려 했는데 우궈전은 강압적인 정치수단을 남용하는 것으로는 경제개혁을 이뤄낼 수 없다며 장징궈의 방법을 크게 비판하고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에게 직접 장징궈가 잘못됐다고 직언해버렸다. 결국 장징궈의 화폐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장징궈는 이것이 우궈전의 탓이라 여겨 이를 갈게 되었다. 우궈전은 이 시기까지 [[후스]], 뇌진을 비롯한 중화민국의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장췬, 우톄청, [[웨이다오밍]], 천이, 왕세걸 등과 함께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인 자유파 인물로 꼽혔다. 상하이 시장 이후에는 총재 판공실 설계위원에 임명되었다. 정치협상 시기 쿤밍에 거주하던 국가사회당원 [[뤄룽지]]를 설득하기 위한 충칭 회담에 참여, 장다오판(張道藩)[* 우궈전 재임기 입법원장 역임. 따라서 정작 우궈전 사건 시기에는 앞장서서 그를 비난하는 역할을 맡았다.], 푸쉐펑(蒲薛鳳)[* 1948~1954년 타이완성정부 비서장 역임. 웨이다오밍 시기부터 우궈전의 후임 위훙쥔 시기까지 장기간 재임했다.]과 함께 뤄룽지를 포섭하는 역할을 맡았다. [[2.28 사건]] 이후 타이완성정부가 설치되자 1대 주석으로 웨이다오밍이 임명되었으며 1949년 1월 1일에 [[천청]]이 2대 주석이 되었다. 이때 장제스는 미국의 민주화 압력을 의식하여 중화민국의 자유파 인사들을 포섭하고자 했는데 이때 장제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 우궈전이었다. 1949년 11월, 장제스의 측근 정제민(鄭介民)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레이턴 스튜어트를 비롯한 외교 측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우궈전을 타이완성정부 주석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우궈전을 3대 타이완성정부 주석으로 지명하였고 12월 15일에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우궈전은 이에 천청이 이미 주석을 잘하고 있다면서 거절의 의사를 비췄지만[* 우궈전은 천청과의 불안한 관계를 임기 내내 신경써야 했다. 특히 천청이 1950년 3월 명목상 상급자인 행정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이 갈등은 격화된다.] 장제스는 "나는 당신이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하오. 부디 앞으로 전력을 다해 당신이 미국의 원조를 획득해주길 바랄 뿐이오."라면서 그에게 주석 자리를 권했다. 결국 우궈전은 주석 자리를 수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