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궈전 (문단 편집) === 장징궈와의 불화 === 맨 처음 불거진 것이 타이완성보안사령관직 문제였다. 타이완성정부 주석은 대만성 보안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천청이 주석이던 시절에는 그의 업무가 바빠[* 천청은 이 당시 중국 동남부의 방어까지 총괄하고 있었다.] 보안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에게 대행하게 했지만 대만성 관련 일만 맡던 우궈전은 여유가 있었으므로 대만성 보안사령관을 겸하였다. 이에 펑멍지는 불만을 품고 장징궈에게 붙어 우궈전을 방해했다. 또한 우궈전은 장징궈가 주도하는 정보기관의 불법 납치를 크게 비판하며 모든 체포는 대만성 보안사령부를 거쳐야 하며 모든 사람은 체포 14일 후에는 기소가 되던 석방이 되던 해야 한다고 장제스에게 직언했다. 장징궈는 이를 자신의 세력에 대한 도전을 여기고 맹렬히 반대했다. 1950년 대만성냥회사 사건이 터지면서 우궈전과 장징궈의 불화는 극에 달했다. 대만성냥회사는 원래 상하이에서 설립된 성냥회사였는데 이사장 오성재는 국공내전 이후 중공에 투항하였다. 이에 중화민국 정부는 오성재를 공비에 부역한 반역자로 등록하였다. 오성재는 영화산업에 종사하며 대륙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을 중상하는 <민국 40년>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장징궈는 이를 듣고 격노하여 대만으로 이동한 대만성냥회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회사 사장 왕철보를 우궈전에게 알리지 않고 체포하였다. 이를 알게 된 우궈전은 왕철보는 무죄라고 석방하려 했으나 팽맹집은 우궈전의 명령을 듣길 거부했다. 이에 장제스가 비서 저우훙타오(周宏濤)를 파견하여 우궈전과 장징궈 사이를 중재하는 한편 자신의 후계자가 될 장징궈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왕철보를 유죄로 하되 우궈전의 입장도 고려하여 사형에서 7년형으로 감형시켜주었다. 이어서 터진 사건은 1952년 타이완성 제2차 현·시의원 선거 때 장징궈가 하룻밤 사이에 398명을 체포한 일이었다. 이중에서 오로지 19명만이 경미한 전과가 있고 나머지는 아예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우궈전은 이들을 3시간 안에 석방시킬 것을 지시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했으나 펑멍지의 사보타주로 명령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펑멍지는 우궈전이 나설 때마다 이것은 [[장제스|장 선생]]의 뜻이다! 라고 엄포를 놓으며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타이완성정부 재정청장 런셴췬(任顯群)이 적산가옥과 국민정부가 대륙에서 가져온 황금을 팔아 불법자금을 마련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장징궈와 우궈전은 또다시 반목했다. 런셴췬은 정부 자산을 불법으로 팔아 장징궈의 정치자금으로 제공했고 우궈전은 이를 참지 못하고 장징궈에게 따진 것이었다. 여기에 군부와 우궈전의 사이도 계속 악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