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덕순 (문단 편집) === 기타 === 만약 우덕순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KBS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가능성이 컸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우덕순의 후손이 있는지 수소문했지만 무소식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우덕순의 후손은 독신이었으며 이미 사망하여 대가 끊겼다. 아래는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문서 글이다. {{{#!wiki style="text-align: center; border: 2px solid #000; background-color: #00A; margin: 0 auto; display: table" {{{#!wiki style="padding: 5px" '''{{{#white KBS 취재진에서 나왔다는 출처불명의 글}}}'''}}}{{{#!wiki style="background-color: #FFF; color: #1208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KBS 취재진이 직접 밝혀둡니다. 바람직한 토론을 위해서 두 가지를 요청합니다. 임의로 타인의 글을 삭제하지 말 것과, 가급적 개인의 주관적 견해로 일관하는 서술이 아닌 객관적 서술을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1. KBS 밀정 2부작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사실상 주관하는 임종국상을 비롯해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 올해의 방송기자상 대상 등 다수의 수상을 기록했으며 위의 주관적인 서술과 달리 임종국상 시상문에는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하고 이들의 행태를 고발함으로써 그간 언설로만 전해져 오던 ‘밀정’의 실체와 죄상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특히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운데서도 밀정 또는 친일 혐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학계와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2. 우덕순은 1945년 해방 뒤 안중근 추모사업 회장직을 맡다가 주변의 지탄으로 스스로 물러나고 만다. 1920년대 이후 그가 조선인민회 지회장 등 일제에 적극 협조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직접 상황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의 증언이며,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다가 취재진에게 익명을 요구했다는 점 등의 이유로 방송에선 반영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3. 조선인민회는 조선인 사회의 각종 정보를 전반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며, 특히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었다. 우덕순은 1920년대에는 하얼빈에서, 1930년대에선 치치하얼에서 조선인민회 지회장을 맡는다. 위의 서술에선 KBS 취재진이 새로 찾아낸 1930년대 치치하얼 조선인민회 지회장 부분을 의도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적시하지 않고 있다. 조선인민회가 어떤 곳이었는가에 대해선 친일반민족 진상규명위 등 정부와 학계 차원에서 이미 성격 규정이 끝난 부분이다. 4. KBS 취재진은 신운용 박사의 논문을 다 읽고 검토했으며, 그러나 신 박사의 과거 논문이 미처 반영하지 못한 새로운 발굴 사료 등으로 우덕순의 친일 행적이 더욱 명료화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은 취재진이 자의적으로 내린 판단이 아닌 다수의 학계 전문가의 판단이다. 5. 위의 서술에는 우덕순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김규흥]]을 언급하며 논점을 건너뛰고 있는데, 김규흥에 대해서도 KBS 밀정 2부작은 배경한 교수의 신중론과 다른 학자들의 비판론을 함께 병치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배경한 교수는 최종적으로는 "판단을 더 해봐야 한다"는 신중론을 펴긴 했지만 김규흥의 행적이 경악할 만한 내용이라며, 만약 과거 서훈 심사 당시에 이런 자료가 있었더라면 훈장이 수여될 수 있었겠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판단이 유보되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앞으로 학문적 토론이 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법원에서도 인정한 대로, 다큐멘터리는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의혹 제기를 매우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김규흥에 대해서도 기존 의혹에 새로 발굴된 자료가 있는 만큼 언론의 비판적 문제제기가 충분히 가능하다. 6. 김달하는 문제적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논쟁과 토론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방송에 반영된 대로 우쓰노미야와의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기에 김달하의 밀정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고 봐야 합리적일 것이다.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는 KBS 방송 이후 한겨레21 기고문에서 김달하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밀정이 맞다고 보는 게 합리적임을 서술하고 있다.(...이 편지에서 김달하가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훼절과 조선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 대가로 거액을 청구했다는 점이 뚜렷이 드러났다.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억울한 죽음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낀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751.html] 7. 어떤 문제적 인물이 친일인명사전에 설령 등재되지 않았다 해서, 혹은 서훈이 아직 취소되지 않았다 해서 그 자체로 그의 삶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서훈 심사가 얼마나 부실하게 이뤄졌는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사료는 꾸준히 발굴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학문적 교정과 정부 차원의 서훈 재심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다. 따라서 언론 보도를 무작정 비판하기 전에 그러한 언론 보도가 다수의 전문가들의 진단을 충실히 담았는가,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언론 보도는 최초의 문제제기를 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다시 당부하지만 타인의 글을 임의로 삭제하면서 본인의 글만 남겨두는 행위는 나무위키의 취지에 맞지 않습니다. 적어도 학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이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내용을 검증할 수 없다. 해당 글이 KBS 취재진의 글이라는 것은 나무위키에 작성된 글 외엔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참고로 나무위키 출처를 근거로 실존하는 기자를 비판했다 틀렸다면 명예훼손 범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글이 KBS 취재인 것과 별개로 확실히 오류(혹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가 있는데 조선인민회 관련부분이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근거로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은 친일반민족행위 기준미달이다. [[http://dl.nanet.go.kr/SearchDetailView.do|국회도서관 링크]] 여기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1-2 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3,1-3,4,를 검색을 해 볼 수 있다. 다운로드는 무료이니 돈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보고서 3-4 482-486 쪽 부록에 등록된 조선인민회 회장은 141 명 이상인데 이중 보고서 238-247쪽 기준으로 (다른 경력이 아닌 조선인민회 회장 경력으로, 그 외 조선인민회장 출신들은 다른 경력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 인간들은 김동만, 김희영, 손정룡, 이갑녕, 임한룡으로 이거 추가해도 5명 추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준을 만족한자는 겨우 '''6명'''(이희덕, 김명여, 김여백, 장우근, 원용국, 박승병)이다. 회장의 단체의 대표 책임자인데 부록에 나온 141명 이상의 명단 중 겨우 6명이라는 극소수만이 기준을 통과한다.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민회장은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분류가 아예 다르다. 다시 말해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도 아니고 그중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건 극소수이며 그 극소수조차 전혀 밀정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조선인민회장 관련 내용과 다르게 쓴셈. 물론 위 글도 '조선인민회장 자체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했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선 조선인민회장을 밀정으로 분류한다'고도 말하지도 않았므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로 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실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기준으로 조선인민회장 자체는 극소수만 제외하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