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덕순 (문단 편집) == 생애 == 1879년 2월 26일 [[충청도]] [[청풍군|청풍도호부]] 수하면 황도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제천)|청풍면]]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 1857. 12. 27 ~ 1886. 6. 24)[* 족보명 우중현(禹重鉉).]과 어머니 [[파평 윤씨]](1856. 10. 10 ~ ?)[* 윤계철(尹啓哲)의 딸이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밀양 박씨]] 박옥희(1895. 9. 17 ~ ?)[* 박주현(朴疇鉉)의 딸이다.]와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우대영(禹大榮, 1915 ~ ?)을 두었다. 그는 4, 5세 되던 해 상경하여 [[한성부]] 서부 여경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신문로]])에 본적을 두었으며, 한성부 동서 창선방 동학계 양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흥인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외에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서 1906년 초 사이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썼다. 1908년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군]]·[[회령군]]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복역 중 탈옥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 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길림성]] 서북로도(西北路道) 신성부(新城府) 채가구역(蔡家溝驛)[*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쑹위안시]] 푸위시(扶餘市) 차이자거우진(蔡家溝鎭) 다오시지에(道西街) 차이자거우역(蔡家溝站).]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채가구역에 정차했으나, 일제가 채가구역을 패쇄해 감금되어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고, 열차는 그대로 [[하얼빈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았고, 이듬해인 1910년 8월 11일 1심에서 소위 내란 및 수도도주 혐의로 유배형 15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4786&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7992&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그해 9월 29일 함흥지방공소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었다. 이후 징역 3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복역 중에 함흥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1923년 11월부터는 [[흑룡강성]] 빈강도(濱江道) 빈강현(濱江縣) [[하얼빈]] 도리지구(道裡地區)[*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다오리구(道裡區).] [[조선일보]] 분국에 [[http://db.history.go.kr/id/im_108_10252|주소지를 두고]] 살기도 했다. [[광복]] 후 [[헤이룽장성]]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외아들]] 우대영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 위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우덕순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별세했다. 우덕순이 어떠한 경위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고 다만 두 가지 이견만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 해 9월 26일에 북한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곳곳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우덕순도 여기에 휘말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다른 이견은 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그 해 9월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0111000239102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11-10&officeId=00023&pageNo=2&printNo=8397&publishType=00010|1950년 11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기반한 것이다. >서울서 납치당한 수천 명의 요인에 관하여서는 현재까지 그 행방이 확인되지 못하고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부분적으로 소식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나 그 중 신의주(新義州) 출신인 류영목(柳榮睦:法專出身 往年의 蹴球選手 법전 출신 왕년의 축구선수)[* 원문에는 柳榮睦을 되어 있으나, 사실 '''유영목(兪榮穆)'''이 맞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재학 시절 축구부 코치를 맡기도 했다. 1931년 봄에 졸업하고 신의주지방법원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1052000209207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5-20&officeId=00020&pageNo=7&printNo=3734&publishType=00020|임용된 사실]]이 전한다.]씨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9월 3일부터 7일 사이에 평양형무소 감방에서 같이 있던 요인 10여 명이 '''학살'''된 것을 이번 평양 수복 직후에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서울시 경찰부국장 최운하씨 등 다음 제씨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준호, __'''우덕순'''__, 장기덕,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최린]], 옥선진, [[최규동]], 김일룡, 박원삼, [[박열]], 이성근, 고창일, [[구자옥]]. >---- > 『조선일보』 1950년 11월 15일자 기사 中[* 신운용, 「우덕순의 민족운동과 해방공간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 2014, 169쪽에 재인용] 다만 이 기사에는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최린]], [[박열]], 고창일 등의 사례처럼 한국전쟁 이후에 사망했거나 다른 경위로 사망했다고 밝혀진 사람들도 전부 학살명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액면 그대로 신뢰하긴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덕순의 유해가 한국에 있는 걸로 근거해 우덕순은 납북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향년 71세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