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마르 (문단 편집) == 제2대 칼리파 취임과 변화 == >아랍인들의 고집은 한 마리의 낙타와 같은 것이어서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에 따라 그 행방이 달려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께 맹세컨데 내가 여러분에게 가야 할 길로 안내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에게 사랑받던 겸손하고 자상한 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를 이어 개종 이전이나 이후나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던 우마르가 칼리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데 탐탁치 않아했고, 따라서 아부 바크르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또 다른 유력 후보자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우마르의 제2대 칼리파 즉위를 적극 추천함으로써 우마르의 칼리파 즉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마르는 >"'''[[움마#s-2|움마]]'''(이슬람 공동체) 내부에서 내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그것은 지금까지의 지도자인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자상한 사람이기에 그들의 검이자 도구로써 강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따라서 칼리파가 된다면 변화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 우마르의 발언에 많은 사람이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지만, 실제로 칼리파의 지위에 오른 우마르는 자신이 말 한 바를 충실히 지켰다. 그 결과 과거 폭력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두려움의 대상이자 거만하고 오만했던 우마르는 '''약자를 보호하고 지나친 팽창과 경제적 타락으로 인한 이슬람의 미래를 걱정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는 현명한 통치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초대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의 행적을 본받아 절대적인 지도자의 명령이 아닌 평등한 공동체의 수장으로서 행동했으며,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직접 소젖을 짜기까지 했던 아부 바크르의 행동은 칼리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거보다 높은 봉급을 받았지만 그것은 '평균적인 아랍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되었다. 그렇기에 결코 풍족하지 못했던 우마르는 전임자들을 본받아 해진 옷을 꿰어 입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까디시야 전투]]에서의 승전 이후 우마르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전령은 메카로 향하던 도중 만난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를 묻는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이 우마르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알려주겠다." 라며 무시했고, 나중에서야 그가 신생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칼리파 우마르인 것을 깨닫는 일도 있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등의 고단한 일을 빼놓지 않고 행했으며, 누군가가 >칼리파가 굳이 이런 행동을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여기서는 나 대신 이런 일을 행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신 앞에서는 나 대신 누가 이런 일을 해주겠는가? 라고 대응할 정도로 남에게 봉사하고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한 공명정대함을 중요시 여겼던 우마르는 여러 명쾌한 판결로 유명했다. 이슬람군에 정복된 후 개종하여 특권적 지위를 유지한 [[가산 왕국]]의 전 군주 자발라가 메카 순례 도중 '타와프'(카바를 도는 의식)를 행하다가 자신의 옷깃을 밟은 평민과 시비가 붙어 서로 한 대씩 뺨을 때렸다. 이후 자발라는 우마르에게 귀족을 때린 평민에 대해 처벌을 요구했는데, 우마르는 계급은 [[자힐리야]]의 산물이라며 거절했다.[* 이후 분노한 자발라는 배교한 후,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로 망명했다] 한편으로는 '''《[[꾸란]]》의 본격적인 집대성'''을 시작하고, 622년 [[헤지라]]를 이슬람 원년으로 삼는 등 여러 가지 의견으로 나뉜 이슬람의 종교생활을 하나로 집대성 하는 데도 큰 노력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