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마르 (문단 편집) === 성지 예루살렘 입성 === 승리의 전진속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 성지 예루살렘이 637년 항복을 요구해 오자 우마르는 손수 항복을 받고자 하인 한 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던 그는 당나귀 한 마리만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에 하인과 우마르가 번갈아 가며 당나귀를 탔는데 마침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에는 하인이 당나귀에 타고 있어 예루살렘의 주요 인물들은 하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이후 승자의 특권을 누리리라 지레 짐작한 기독교측 인물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당에서 이슬람의 예배가 행해지려 했으나, 우마르는 >'''만일 내가 이곳에서 예배를 올린다면 이 장소는 조만간 무슬림들에 의해 모스크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무슬림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너희는 지금까지처럼 살고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신을 숭배하라. 다만 이제부터 우리 무슬림들이 너희와 함께 살아갈 것이며 우리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것이며 더 나은 모범을 보일 것이다. 너희가 보고 마음에 든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대로도 괜찮다. 라고 거절했으며 이는 >종교는 강요해서는 안 된다. 는 무함마드의 뜻과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또한 성지 예루살렘이 몹시 더러운 것을 보고 화를 내며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훗날 [[바위의 돔]]이 건설될 장소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이슬람 세계에 영구히 영향을 미칠 또 다른 규범인 '''[[지즈야]]를 성립시켰는데,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세력에게 특별 인두세를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세금이라는 부담이 더해진다는 의미였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 발생한 선페스트 이후 급증한 세금 부담과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총력전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데다가, 초기라 세율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후임인 [[우스만]]이 재정 안정화 정책을 위해 세율을 올리면서 점차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우마르는 이 외에도 몇몇 조치를 행하며 성지 예루살렘의 안정에 힘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