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마르 (문단 편집) === 팽창의 후유증 === 하지만 이런 엄청난 정복들을 총지휘한 정복자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우마르 자신은 정복 전쟁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점령군을 보내면 군사적, 도덕적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심지어 페르시아 정복을 반대하며 이슬람 세력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경을 유프라테스 강으로 설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 엄청난 정복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엄청난 부가 축적되자 오히려 눈물을 흘려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알라는 이런 커다란 보상을 주시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 질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신다." 는 신념 때문이었다. 사실 우마르의 걱정은 이미 당대부터 '도시에 입성한 군사들이 게을러진다' 혹은 '뚱뚱해진다'는 식의 보고가 들어오면서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를 막고자 우마르는 이슬람 정벌군에게 도심이 아닌 별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머물 것을 명령했다.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벌군과 토착민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어 이슬람 초기의 순수한 열정은 점차 퇴색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일례로 정복지에 설립된 군영 중 하나를 방문한 우마르를 환영하고자 군사들이 도열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황금과 비단을 비롯한 각종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우마르는 돌을 집어 던지며 그들의 인사를 무시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에서는 그동안 야만인으로 멸시해오던 아랍인에게 정복당했다는 민족적인 울분감이 있었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자체는 우스만을 인정했지만 알리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우스만이 알리에게 돌아올 칼리파직을 찬탈했다는 의심을 하고 있어서 우스만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후에 시아파가 성립되고 나서는 우스만이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를 괴롭혀서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었다는 유언비어가 나오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팽창을 통해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정복된 지역들의 행정 풍습을 받아들여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했는데, 이 결정을 통해 언제나 분열과 대립을 우려하던 우마르의 걱정이 현실화했다. 이 시기부터 이슬람 세계는 미약하게나마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 각지의 사령관은 칼리파의 지시를 무시한 채 정벌 활동을 벌이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중앙정부의 의사와는 별개로 진행된 정복 사업에서 나온 막대한 부는 차후 사령관 휘하의 군대가 사병으로 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특히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쿠라이시 부족 우마이야 가문 출신의 [[무아위야 1세|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두드러질 정도로 세력 확충에 열을 올렸는데, 무함마드가 자신을 반대하던 무아위야를 용서하고 중용하면서도 항상 그를 가까이에 둔 것은 그를 감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마르 시대부터 고삐가 풀린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친족 우대 성향을 지닌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 시기에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치세에는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한편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통해 알리의 세력을 고립시켜('''제[[1차 피트나]]''') 끝끝내 이슬람의 근본 체계를 무너트려 초창기 이슬람이 그토록 반대하던 통속적인 왕정 세습 국가인 쿠라이시 부족 우마이야 가문을 위한 [[우마이야 왕조|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창설하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