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병우/일생 (문단 편집) === [[검사(법조인)|검사]] 시절 === 1990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평검사 시절 [[김태촌|서방파]] 행동대장 이양재[* 그의 공직생활의 시작과 몰락이 조직폭력배인 서방파와 관련이 있다. 참고로 이양재는 [[정운호]]가 자회사 자금 35억 원을 빌려준 뒤 호텔 2개층의 전세권을 개인 명의로 받았다가 [[정운호 게이트]] 이후 기소 혐의 중 하나인 배임죄가 적용된 계기가 된 호텔 라미르의 소유주이다. 법조 브로커 이민희도 호텔 라미르의 부회장 직함을 가졌던 적도 있다.], 대전진술파 두목,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 [[수련의]] 임용과정에서 돈을 받은 피부과장 등을 구속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시내 폐수·소음·진동을 배출한 환경오염업체 55곳에 이어 세균폐수를 방출한 을지병원·[[백병원]]·[[차병원]]·[[중앙대학교병원]]을 적발했다. 1992년 8월 26살에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검사로 부임, 1993년 [[경주대학교]], [[서라벌대학교]] 이사장 [[김일윤]] 前 의원[* 김일윤은 14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고 당시 사학운영에만 전념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사학비리로 구속되었으며 이후 출소한 뒤 15~16대 의원을 지내고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5선을 했으나 또 다시 비리로 의원직을 잃는다.]을 학교공금 53억인 횡령혐의로 기소하고, 아파트 감리와 관련해 청탁한 [[경주시]] 건축과장 등을 구속하는 등 정권 핵심에 친분이 있는 지역 유지를 수사하다가 창원지방검찰청 밀양지청으로 내쳐졌다고 한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2114.html|관련기사]] 참조.] 그 후 1994년 2월 28살에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1997년 2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를 거쳐 1999년 2월부터는 법무부 국제법무과에서 근무하고, 2001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형사6부에 부임했다. 이때 [[영화]]배급을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직배영화사 전 대표와 영화사 대표를 구속했다. 2001년 12월부터 2002년 3월까지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팀 특별 수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당시 송해운·[[윤대진]] 검사[* 윤대진 검사는 2014년 [[세월호]] 사건과 관련 검찰이 해경 상황실 서버를 압색할 때 우병우(당시 민정비서관)와 통화를 한 당시 수사팀 간부였던 광주지검 형사2부장이다.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박영선 의원이 실제로 이 사건을 우병우에게 추궁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병우는 부인했으나, 전화를 했다는 사실은 시인했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엘시티 게이트]] 수사를 진두 지휘를 했으며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61222.99002180605|기사]]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중앙지검 1차장, 수원지검장,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맡은 특수통 검사이다.]와 함께 ‘이용호 게이트 특검’(차정일 특검) 특별수사관 3인방으로 불렸다. [[참여정부]] 시절의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가장 성공한 특검으로 평가받는 [[이용호 게이트]] 특검은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인 신승환을 구속함으로써 신승남 총장의 조기퇴진을 가져왔다. [[파일:11_11_11_35_SMLn_D003_0_5.jpg]] 영월지청장 시절의 우병우 2002년 36살에 춘천지방검찰청 영월지청장으로 부임했고[* 이 시기에 대학동기가 영월지청에서 근무했는데 남들 보는 앞에서 갈궜다는 설이 있다.](부부장 승진), 2003년 8월에는 서울지방검찰청 부부장으로 올라왔다. 그 시절 [[이정일(1947)|이정일]] 민주당 의원[* 경쟁후보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도청기를 설치하였는데 이게 걸렸다. 결국 이정일은 의원직을 잃고 만다.], 이상국 KBO 사무총장을 긴급체포하거나 구속했다.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도 소환조사했고,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을 불구속 기소했다. 김광식 전 강원랜드 대표와 권오정 전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이사장, 심기섭 농수산물유통공사 감사 등도 그의 칼날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관련해서는 '봐주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사건 수사에 참여했을 때는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삼성그룹]]은 특수2부 부장검사부터 평검사까지 모든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붙였으나, 유독 부부장이던 우병우만 삼성그룹 사람들을 절대 만나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결국 신상규(서울중앙지검 3차장)-[[채동욱]](특수2부장)-우병우·박용주로 이어지는 수사진은 2003년 12월 업무상 [[배임]]의 [[공소시효]](7년)를 하루 앞두고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을 전격 기소했다. 당시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직접 관여한 일부 인사들을 '표본'으로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가 바로 우병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우병우 검사가 수사의 구슬을 뀄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참고인 중지 결정'을 내려 [[이건희]]&[[홍라희]] 부부를 수사대상에서 제외하는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 어쨌든 이러한 분리기소는 2007년 '1심보다 더 무거운' 항소심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4년 6월 38살에 대구지방검찰청 특수부 부장으로 발령받았다(부장승진).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 등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통 검사'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이때 대구 유니버시아드 휘장 비리 사건을 수사하며 [[신성일|강신성일]] 의원, [[박주천]] 전 의원, [[김명규(정치인)|김명규]] 가스공사 사장, [[박명환(정치인)|박명환]] 전 의원 등을 구속시켰다. 당시 우병우는 김향곤 고령군수에게 회식자리에서 요새 민선자치장들은 목이 뻣뻣하다."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지방 검찰청의 부장검사와 인구 10만 이하 지자체의 민선 지자체장은 [[공무원/계급|공무원의 계급 체계]]에 비교할 경우 대략 3급 정도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즉, 애초에 계급의 높고 낮음을 따지기 어려운 전혀 다른 영역이지만, 굳이 위계를 따진다 해도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상식과 규범에 비추어 생각할 때, '자신과 비슷한 지위에 나이도 훨씬 많은 사람'을 상대로 면전에서 "목이 뻣뻣하다" 운운하는 이는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써 용인받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직'의 민주적 정통성은 임명직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고,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선 지자체장은 '지역 주민의 정치적 대표자'라는 강력한 위상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특수부 부장검사에게는 관할지역 시골 군수정도는 비리를 포착해서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검사의 직무상 상대가 누구든 그 지위와는 상관없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므로 오히려 평상시에 이를 근거로 자신의 위세를 내세울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특수부 부장검사가 마음만 먹으면 지방 군수 정도는 한방에 날아가는데 굽실거리지 않는 것이냐?' 라고 말한다면 '만약 군수에게 모가지가 날아갈 정도의 비리나 범죄가 없을 경우에는 어쩔 것인가?' 또는, '비리가 있더라도 목이 부드러우면 봐줄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반문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당시 우병우의 상관인 정동기 대구지검장이 이 소식을 듣고 우병우를 질책했다는 후문.] [[2005년]]부터는 2년간 법무부 법무실 법조인력정책과 과장으로 일했다. 법조인력정책과의 주요업무는 [[사법시험]] 출제와 관리였는데, 당시는 1,000명을 사법연수원생으로 선발하던 명실상부한 사법시험의 최전성기였다. 그 결과 법대생뿐 아니라 공부 좀 한다 하는 명문대 문과 학생들 상당수가 이 시험에 달려들었고, 시험의 공정한 출제/채점 및 (특히 1차시험의) 변별력 확보가 큰 과제였다. 우병우는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영어자격시험 성적 제출기한을 1차시험 전날까지로 늘리고, 사법시험 원서 인터넷 접수제도를 실시하는 등[* 2020년대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2004년까지만 해도 사법시험은 물론 국내 상당수의 진학/자격증 원서접수가 현장에서 실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험생의 편의를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반면 수험생 간 변별력 확보를 위해 [[민법]] 과목의 비중을 100점에서 150점으로 늘리고[* 이는 변별력 확보와 동시에, 법학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과목인 민법에 더 높은 가중치를 두어 법조인력을 선발하겠다는 의도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8지선다형'''[* [[사법시험]] 문서의 1차 파트에 예시로 제시된 민법 문제가 이 8지선다형의 전형적인 사례이다.]을 비롯한 고난도 문제를 1차시험에 많이 출제하여 평균점을 크게 떨어뜨리는 시험설계를 담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당시 고시생들은 "우병우 과장"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법조인력정책과장 임기를 마치고 검찰로 복귀하면서 법률저널과 한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28|인터뷰]]에 우병우의 수험법학과 사법시험에 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2007년]] 2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 자격으로 [[예금보험공사]]에 파견되어 부실채무기업특별조사단 단장을 맡았다. 2008년 3월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금융조세조사2부 부장검사로 활약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시절이던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의 처사촌 김옥희의 공천 청탁 금품 수수 사건[* 이명박이 서울시장을 하던 시절에 버스운송조합 이사장을 지낸 김종원 [[도원교통(서울)|도원교통]] 사장이 국회의원 공천을 받고 싶어 김옥희에게 뇌물 30억을 바친 사건.]을 수사했다. 이명박 정권이 공식 출범한 지 5개월 만에 일어난 친인척 사건이었다. 결국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을 미끼로 30억여 원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로 같은 해 8월 김 씨를 구속했다. 그리고 김평수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을 구속했는데, 그 과정은 집요하다 못해 지독할 정도였다. 구속영장이 2번이나 기각된 김평수에 대해 반년 이상 추가 수사를 벌여 결국 배임수재 혐의로 3번째 영장에서 구속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