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산국 (문단 편집) == 멸망 == 그러다 [[1018년]] [[우산국 여진족 해적의 침입|여진족 해적들의 약탈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후에]] [[1022년]] 남아있던 주민들 대다수가 고려로 귀부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다만, 이후로도 고려로의 귀부를 거부한 일부 우산국 주민이나 섬에 정착한 여진족 해적, 고려 본토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 소수나마 섞여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이전처럼 국가라고 불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11월 병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고려사, 덕종 원년 11월 기사』] 그런데 그마저도 조선 초 [[공도 정책]]으로 인해 모두 쇄환되어, 사실상 [[무인도]]인 상태로 있다가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울도군]]을 설치함과 동시에 주민을 재식민하였다. 조선 시대 때 공도 정책을 펼친 이유는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 관리하는 것보다는 그냥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거주민을 없앤 것 뿐이지 섬에 대한 관리를 완전히 손 뗀 것은 아니고, 숨어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하거나[* 군인들이 없기에 매우 위험하다.]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몇년 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점차 느슨해져 중종이후로는 파견 기록이 없으며, 때문에 한동안 거주하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무인도로 배타고 가서 자연인 생활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러다 [[안용복]]과 일본의 외교적 충돌로 인해 장한상이 울릉도에 파견되고, 이후 다시 정기적 사찰을 하다 고종 때 개척정책이 실시된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어느정도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인지도는 물론 기록 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한 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뿐이며, 그 외에 약간의 [[고고학]]적 단서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