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상호 (문단 편집) === 민주화 운동 === 군대전역 후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게 일반적인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상호는 다른 운동권 학생들과는 달리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한다. 문학 친구였던 인권운동가 박래군[* 민주화운동가 고 [[박래전]] 열사의 형.]이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등록금이 없어 입대한 후 나온 휴가에서 박래군이 강제징집 당한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우상호는 '84 국문과 강타'라는 가명으로 3년 후배들과 함께 조를 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후배들과도 격의없이 지내는 계기가 된다. 당시 학생운동은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것에 반해 매우 특이한 케이스로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다.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 터진 후 특유의 인망으로 인해 학생회장을 권유받는 원인으로 발전한다. 당시 학생운동은 경찰과 충돌이 격화되면서 천여 명이 구속되고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존 학생운동 참여자 중 절반 가량이 잡혀간 상황으로,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비운동권 학생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운동권의 시각이 있었다. 한편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자기방어 차원에서 운동권의 투쟁 양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촌놈 214p.] 우상호는 자신을 추천한 대학 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내방식대로 맡겨달라고 요구한다. 우상호가 출마한 1987년 연대 학생회 선거는 약 500명이 모였는데, 지원 유세에 문화제 방식의 선거운동이 가미 되자 약 2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비폭력주의]] 집회의 일환으로 등장한 문화제 형식 선거운동은 다른 대학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내 운동권 서클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기존 시위방식이 달라지자 불만을 가졌다. 우상호는 공개토론을 열어 비폭력 집회 방침을 관철한다.[* 촌놈 216p.] 늦은 참여로 인해 비운동권 학생들 역시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음을 이해한 우상호는 자신의 노선을 이렇게 표현한다. '한 사람의 열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중요'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의 정치활동과도 이어진다.[* 열의걸음은 이한열 열사의 추모곡 제목이기도 하며, 30년이 지난 후 연세대학교 이한열학생위원회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이 때 학생운동 지도부에 당선되면서 폭력운동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한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을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 변화를 시도하다 강성 지하 서클에게 고초를 겪기도 한다. 한 예로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이야기를 하다가,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 222p.]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전환시키자 급격하게 학생들이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체육관 선거를 규탄하다 결국은 6월항쟁의 주역이 된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향후 정치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을 간선제로 뽑는 [[호헌조치|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하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 세력은 강경해진다. 이에 앞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서울대 박종철 군의 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됐다]]는 폭로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터지면서 정국이 발칵 뒤집힌다.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집회를 추진했다. 이들은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 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전보다 다수가 참여한 집회 규모에 당황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직사로 쏘기 시작하고 여기서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이 사망한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때에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880|#]]. [[6월 항쟁]]이 발발하며 국민적 저항에 견디다 못한 전두환 정부는 결국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4.13 호헌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명줄을 재촉한 자충수가 되어 버렸던 셈이다.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이한열 열사의 상을 찾아갔고, 상주인 우상호에게 학생들 덕에 풀려났다며 울먹인다. [[파일:200102141.jpg|width=100%]] 1987년 8월 22일, 연세대학교 안에서 연 49재 행사 때 촬영한 사진. 가운데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청년이 우상호이다. 사진 오른쪽 [[태극기]]를 들고있는 사람은 배우 [[우현(배우)|우현]]이며 연세대학교 앞 [[경의선]] 신촌철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장소는 현재의 [[연세로]]이다. 여기서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은 이한열 영정을 들고 교문 밖으로 나가다 경찰에 연행됐다. 잡아갈 줄 알면서 독재에 그렇게 항거했다. 그렇게 6월 항쟁이 끝이 났다. [[파일:KakaoTalk_20210216_025924755.jpg|width=100%]] 이후로도 이한열 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한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때문인지 "나는 이한열 군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 1월 배은심 씨가 별세하셨을때도 호상(護喪)을 맡았다. 또한 이 당시의 인연으로 배우 [[우현(배우)|우현]]과 [[안내상]]과는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하며, 20대 총선과 21대 총선 유세 때 [[https://youtu.be/J1fYjwd4dqw|두 사람이 우상호를 지원하기도 했다.]] 박종철 열사에 대한 죽음의 진실을 밝힌 [[최환]] 공안부장 검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전 공안검사시절 자신의 선배들을 많이 잡아갔기 때문에 미운 감정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인 [[이한열]] 열사가 많이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