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상호 (문단 편집) === 탄핵안 가결 ===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민주당 [[추미애]] 지도부는 당의 노선을 3단계로 정리한다. 1단계는 [[박근혜]]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2선 후퇴, 2단계는 하야 요구, 3단계는 탄핵당론 확정이다. 해당 과정에서 한 번이라도 박근혜 청와대가 동의했다면 탄핵안 가결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타협을 거부하면서 정권을 나락으로 몰고 간다. 우상호는 이 과정에서 새누리 비박계를 분리해 탄핵안 가결로 끌고 오는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시 민주당은 추미애 전 대표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0791987|우상호가 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보수진영 시민도 납득할 만한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자는 전략인 셈이다. 우상호는 문재인 전 대표에게도 이를 납득시켰기에 문재인 역시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초반부터 진영간 대결로 가면 보수진영의 시민도 결집하고 탄핵 소추안에 필요한 새누리당내 40석이 넘어올 리 없다는 우상호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절충안을 계속 제시하는 우상호의 전술은 촛불집회와 맞물려 시너지를 낸다. 문재인 전 대표가 제안한 거국 내각이 거부되자, 촛불집회는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규모로 갈수록 불어났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이에 공포를 느껴 우상호와 협상했는데, 여기에서 도출된 절충안인 조기하야 요구를 박근혜 청와대가 거부하자 민주당은 결국 탄핵안을 당론으로 채택한다. 비박계는 그동안 탄핵에 부담을 느껴왔으나, 자진 사퇴 요구가 거부되자 당내 생존을 위해서라도 탄핵 찬성으로 마음이 쏠렸다. 김무성계, 유승민계 등으로 분류되는 비박계는 '여당 내 야당' 행위를 강하게 보복해 온 친박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국정농단의 책임까지 공유하기도 싫을 수 밖에 없었다. 우상호는 이들과 협상해 비박계의 활동 공간을 열어주며 보수진영 내 비박 지지층의 이탈을 유도한다. 한편 새누리당 지지층이 붕괴하자 민주당,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 [[정의당]] 간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대선주자와 정당 지지율이 민주당에 못 미쳤던 국민의당은 탄핵소추안 상정 시기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당대표 간 회동에서 [[박지원]]은 12월 9일을, 추미애는 12월 2일을 주장했다.[* 우상호는 1년후에 12월 2일 상정은 비박계의 찬성표를 확보하기엔 상당히 아슬아슬했음을 술회한다.] 광장의 민심을 고려하지 않은 국민의당이 비판을 받자 박지원은 JTBC에 출연해 "국민 70~80%가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는 주장을 펼치며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89|자충수를 던진다.]]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일어나면 민주당, 그리고 문재인에 유리한 선거국면이 형성된다고 판단하며 그랬던 것이다. 박지원은 비박계를 빌미삼아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박영선]], [[박병석]] 등이 토론회에 참여하는 등 [[내각제]]에 지지를 보냈으며 국민의당의 이상돈 또한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4946?no=144946#0DKU|내각제 개헌 주장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이런 계산에 분노한 시민들이 비박계와 국민의당에 수백만개의 문자행동(폭탄)을 시전하며 원포인트 내각제 개헌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12월 2일 상정이 불발된 다음날 232만명이 촛불집회에 나오며 무시무시한 민심을 보여주었다. 그 덕에 민주당 원내지도부의 설득과 박근혜정부의 표단속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비박계는 굴복하게 된다. 절충안을 제시해 온 우상호도 시민들에게 비박계와 같은 취급을 받았지만 오히려 비박계, 국민의당과 공감대를 갖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표단속을 이어나간다. 우상호는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타 정당에 대부분 양보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은 국민의당 출신 [[김관영]]이 맡고 [[헌법재판소]]를 담당할 탄핵소추위원단장은 비박계인 [[권성동]]이 맡겠다는 주장을 인정하며 탄핵의 정치적 장면을 타당에 넘겨주는 대신, 표 계산에 집중했다. 우상호는 국회 의결 당일 당 지도부에 222표에서 226표가 확보되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11월 말에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611282238015|우상호와 표계산이 달랐던 친박계]]는 12월 9일에도 이탈표가 25표에 불과해 부결될 것으로 예측했다. 우상호는 친박계가 오판한 이유를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새누리당보다 국정원, 우병우 라인의 보고서를 더 신뢰했기 때문' 으로 추정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459|#]] 그렇게 모두가 불가능할 것[* 당시 민주당 의석은 121석이고 탄핵을 위해서는 200석 정도가 필요했다.]이라고 말한 탄핵을, 결국 광장의 시민들과 우상호 전략의 결합으로 성공시킨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49|#]] 우상호 의원은 자신이 [[6월 민주항쟁]]의 주역이 됨과 동시에 [[박근혜 탄핵]]의 주역이 될 수 있어서 기뻤으며, 운명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파일:탄핵직후.jpg]] 그 날, 인터넷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던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한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인사의 대상이 방청석에 있던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된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232351|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나앉았던 유가족을 방청석에 앉히고 그 순간을 선물하고자 한 건 우상호의 아이디어였다.]] 탄핵으로 인해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조기 대선으로 치러지자, 우상호는 취약지역, 소외지역 전문 유세단 봄봄유세단을 지휘한다. 보통 대선 일정이 12월이던 시절은 대선 레이스가 약 반년 전에 결정되고, 선출된 후보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 번 씩은 지역을 방문하고 지역의 전통적인 조직과 지지층을 결속한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안철수와의 단일화 이슈로 인해 공조직이 정지된 시절이 길었다. 당시 공보단장이었던 우상호는 조기 대선으로 인해 다시 민주당이 유세 일정에 제한을 받자 [[https://youtu.be/iD7G_eZsJP0|대선후보자 선거 유세단과는 따로 초재선 중심의 유세단을 만든다.]] 당대표인 [[추미애]]와 함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국-[[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제19대 대통령 선거]]라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당을 별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19대 대선의 승리와 함께 명예롭게 임기를 마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