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상화 (문단 편집) ==== --[[소련]]-- (멸망) ==== [[블라디미르 레닌]] 집권기부터 레닌의 사진과 어록들이 널리 퍼지는 등 우상화의 조짐이 보였으나[* 다만 레닌은 자신에 대한 우상화가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구축하려는 모든 노력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소련의 본격적인 우상화가 시작된 시기는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부터다. 스탈린은 1929년에 50세 생일을 성대하게 맞이한 것을 계기로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을 시작했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 이를 본격화했다. 보면 북한, 마오쩌둥의 우상화와 정말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실 북한과 마오쩌둥의 우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를 철저히 모방한 후 확장한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실상 논외인 북한의 김씨 삼부자를 제외하면 니야조프, 마시아스 응게마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우상화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고 공산권 내부에서도 우상화 하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철저한 우상화를 시행했다. 사실상 공산권 우상화, 아니 근현대사 전세계 지도자 우상화의 시초격 인물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 스탈린의 초상화나 사진[* 스탈린이 직접 승인한 것이어야 가능했는데 사실 스탈린은 어릴 적 마차 사고를 겪었기에 왼쪽 팔이 온전치 못했던 데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어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은 모든 공공장소, 사무실, 몇몇 가정, 심지어 극장 스크린의 양쪽 끝마다 걸려 있었고 광장이나 문화 회관, 공장, 기차역, 운하, 거리, 공원, 도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스탈린그라드]]가 유명하며 이 도시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가 소련에만 적어도 4곳이 있었고 2차 대전 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가 생겨났다.], 상(賞), 산[* 소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던 [[이스모일 소모니 봉]]은 물론이고 불가리아와 슬로바키아(이자 모든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에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으며 심지어 '''[[캐나다]]'''의 [[로키 산맥]]에 있는 산에까지 '스탈린 산(Mount Stali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다른 산들은 스탈린 사후에 스탈린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심지어 캐나다의 '스탈린 산'은 '''1987년'''까지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의 항의로 마운트 펙(Mount Peck)으로 변경되었다.] 등에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으며 공공장소와 당 사무실은 물론이고 도시의 중심, 마을 광장, 도로의 종점, 기차역, 공원, 광장, 정원, 학교 부지, 병원 캠퍼스, 고등 및 중등 교육 기관을 넘어 심지어 산꼭대기와 깊은 숲속에까지 스탈린의 흉상과 동상이 배치되었다. 한 도시에 스탈린의 동상이 두세개씩 있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제3세계]]의 주축 격이었던 [[유고슬라비아]]와 [[김일성]] 우상화에 여념하던 [[북한]] 정도를 제외한 모든 공산권 국가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심지어 스탈린 사망 2년 후에도 러시아에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 중 압권은 [[1952년]] 7월 27일에 [[볼고그라드]]의 [[볼가-돈 운하]] 입구에 세워진 [[https://ru.wikipedia.org/wiki/%D0%9F%D0%B0%D0%BC%D1%8F%D1%82%D0%BD%D0%B8%D0%BA_%D0%9B%D0%B5%D0%BD%D0%B8%D0%BD%D1%83_%D1%83_%D0%B2%D1%85%D0%BE%D0%B4%D0%B0_%D0%B2_%D0%92%D0%BE%D0%BB%D0%B3%D0%BE-%D0%94%D0%BE%D0%BD%D1%81%D0%BA%D0%BE%D0%B9_%D0%BA%D0%B0%D0%BD%D0%B0%D0%BB#/media/%D0%A4%D0%B0%D0%B9%D0%BB:%D0%9F%D0%B0%D0%BC%D1%8F%D1%82%D0%BD%D0%B8%D0%BA_%D0%A1%D1%82%D0%B0%D0%BB%D0%B8%D0%BD%D1%83._%D0%A1%D1%82%D0%B0%D0%BB%D0%B8%D0%BD%D0%B3%D1%80%D0%B0%D0%B4,_%D0%BD%D0%B0%D0%B1%D0%B5%D1%80%D0%B5%D0%B6%D0%BD%D0%B0%D1%8F_%D0%92%D0%BE%D0%BB%D0%B3%D0%BE-%D0%94%D0%BE%D0%BD%D1%81%D0%BA%D0%BE%D0%B3%D0%BE_%D0%BA%D0%B0%D0%BD%D0%B0%D0%BB%D0%B0.jpeg|57m 높이의 스탈린 동상]]이었는데[* 정확히는 동상 자체의 높이는 27m고 받침대의 높이는 30m였다.] 이는 '''그 유명한 평양의 김일성 동상의 2배를 거뜬히 넘는 거대한 동상이었다.'''[* 이 동상은 1962년 3월에 철거되었고 이후 레닌 동상이 세로 세워져 1973년 4월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스탈린의 동상은 1937년에 모스크바 운하 입구에 건립된 [[https://pikabu.ru/story/pamyatnik_stalinu_na_kanale_imeni_moskvyi_sssr_1940e_4278686|37m 높이의 동상]]으로[* 이 역시 동상 자체의 높이는 25m고, 받침대의 높이는 12m였다.], 이 동상을 모방한 스탈린의 동상이 거의 모든 소련의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동상 역시 1962년에 철거되었고 옆에 똑같은 크기의 레닌 동상이 같이 세워졌기에 스탈린 동상 터는 2018년에야 설치된 기념 명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레닌의 적통 후계자로 간주되면서[* 이를 위해 스탈린의 지지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2인자가 [[레온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이라고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으며 스탈린의 권력이 최정점에 이른 후에는 다른 참여자들의 역할이 대폭 축소된 것을 넘어 소련 혁명이 사실상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만의 역사로 수정되었다.] '비할 데 없는 천재', '위대하고 사랑받는 스탈린', '세계 혁명을 이끄는 수장이자 명석한 이론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자', '우리 국민과 전 세계 노동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친애하는 남자', '인류의 뛰어난 천재', '공산주의의 위대한 건축가', '인간 행복의 정원사', '전지전능한 지도자', '국가의 수호자', '선지자, 사도 및 교사', '새로운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자', '진보적 인류의 지도자', '우리의 길잡이 별', '아버지, 선생님, 친구', '위대한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이자 스승', '~의 가장 친한 친구', 특히 '국가의 아버지' 등 온갖 호칭들이 붙었고 심지어 '그는 우리들의 경애하는 아버지이자 우리의 절친한 안내자요 교사이며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정권 속의 소련 국민들은 스탈린 정권 하에서 살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는 아부의 극한을 보여주는 찬양도 생겨났다. 게다가 스탈린이 쓴 책들은 무려 7억 600만 부나 팔렸으며 스탈린 찬양 서적은 미취학 아동 버전과 노인 버전까지 나왔다. 물론 소련 안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 덕이었고 모든 작품은 '스탈린의 천재성' 덕분에 나온 것이었으며 과학 서적은 물론이고 요리책에까지 스탈린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다게스탄 공화국]]의 한 여인이 '하늘보다 높은 사상과 태양보다 빛나는 지성을 가진 지도자'라며 스탈린을 찬미하는 시를 짓는 등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와 노래, 영화들도 수두룩하게 만들어졌고 공설 잔디밭에도 스탈린의 모습을 본뜬 꽃밭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후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는 더욱 고조되어 1949년에는 공산권에서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서명과 선물로 산을 이루었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약 900만 명이 서명한 축하 메시지가 336권으로 출판되었고 북한에서도 정확히 1676만 7,680명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400권의 축하 메시지를 보냈으며 직접적인 생일 축하 편지와 전보는 전 세계에서 100만 통 넘게 왔다고 한다. 스탈린은 자동차 몇 대와 비행기 1대는 기본에 중국에서 쌀알 한 톨에 새겨진 본인의 초상화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만들어진 집무실에 있는 본인을 묘사한 70제곱미터짜리 양탄자, 250점의 동상과 500점의 흉상 등 온갖 생일 선물을 받았다.] 스탈린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흉상이 [[중앙아시아]]의 38개 산봉우리에 배치되기도 했다. 게다가 스탈린은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자상한 지도자의 모습을 좋아했기에 자신의 사진을 [[보육원]], 고아원 및 학교의 출입문 위에 걸고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주신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외치게 했으며 학교에서는 스탈린이 '소련 아이들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1936년 1월 27일에 8살이었던 [[부랴트인]] 소녀 엥겔시나 '겔리야' 마르키조바(Engelsina "Gelya" Markizova, 1928~2004)가 [[크렘린]]에서 열린 소련의 지도부와의 회의에 참석한 스탈린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고 스탈린이 자상한 표정으로 겔리야를 품에 안은 모습을 담은 사진은 소련 전역에 수백만 장이 인쇄되어 유포된 것을 넘어 학교, 고아원, 유치원, 어린이 도서관, 모스크바 중앙 어린이 극장의 벽에 그림으로 그려지기까지 했으며 이 사진의 모습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이 공장에서 300만 점이나 생산되어 학교 운동장, 공원, 광장 및 기타 기관에 설치되었고 이들의 만남을 다룬 동화책도 10만 부나 인쇄되기도 했다. 이 사진은 ''행복한 어린 시절'의 살아있는 상징'이자 스탈린에게 '어머니처럼 팔에 아이를 안고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으로 여겨졌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elya_Markizova.jpg?uselang=ru|겔리야와 스탈린의 사진]][* 아이러니하게도 부랴트 지방의 농업인민위원회 위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 사진 촬영으로부터 얼마 되지도 않은 1938년 7월에 '일본 스파이, 트로츠키주의자, 테러리스트, 스탈린에 대한 전복 음모'라는 거짓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어머니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1년간 투옥되었고 남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후 한동안 소아과 의사로 일하다가 2년 후에 의문사했고 겔리야는 고아가 되어 [[모스크바]]의 친척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겔리야와 찍은 사진의 선전 효과가 워낙 좋았던 나머지 소련의 선전가들은 사진 속에서 하루아침에 '국민의 적'의 자식이 된 겔리야의 모습을 지우지는 못했고 대신 '공식적으로는' [[목화]] 따는 일로 훈장을 받은 맘라카트 나캉고바(Mamlakat Nakhangova, 1924~2003)라는 [[타지크인]] 소녀가 어릴 적에 스탈린과 함께 촬영한 것으로 변경된 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널리 쓰였다. 이후 겔리야는 중국과 인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되었으며 2004년에 [[튀르키예]]에서 사망했다.] 사실 이 사진 외에도 스탈린은 종종 소련의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하거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사진을 찍고는 했다. 심지어 대숙청을 주도한 [[니콜라이 예조프]]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의 이름을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뜻의 '스탈리노다르'로 바꾸자고 했고 극단적인 추종자들은 소련의 [[역법]]은 [[서력기원|예수가 태어난 연도]]가 아니라 스탈린이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지만 스탈린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거절했다. 이렇듯 스탈린 본인은 자신의 우상화가 도가 지나치다며 불평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눈감아 줬다. 스탈린 사후에는 격하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상화가 점차 약해졌다. [[니키타 흐루쇼프]]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기쯤 되면 일반인들은 지도자 가지고 농담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통제가 풀렸다. 그리고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는 더 자유로워져서 러시아 인터넷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대상으로 희화화도 어느 정도 한다. [[방사능 홍차]] 밈이 있지만 사실 푸틴은 의외로 자신이 비판에 관대하다는 쿨한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러시아 일반인들이 농담이나 가벼운 비판을 하는 정도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아직 레닌 동상은 러시아 여기저기 많이 남아있긴 한데 소련 시대와는 다르게 역사의 흔적이자 러시아의 위인 중 한 명으로 보는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