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상화 (문단 편집) ==== --[[이탈리아 왕국]]-- (멸망) ==== >'''무솔리니는 늘 옳다(Il Duce ha sempre ragione)''' >---- >무솔리니가 집권할 적에 내세운 구호. [[베니토 무솔리니]]는 대규모 우상화를 자행한 거의 최초의 독재자라고 할 수 있으며 우상화의 질적 수준도 가히 엄청났다. * 지도자 자신을 신의 대리자가 아닌 신의 화신 그 자체로 보이도록 했다. * [[로마 진군]] 10주년이었던 1932년 10월 28일에는 '혁명 전시관'을 열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혁명'과 관련된 전시품들을 전시하게 했는데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약 400만 명이 이 전시관을 방문했다. * 그의 출생지인 작은 마을 프레다피오도 '국가적인 성지'로 탈바꿈해 매일 수천 명이 '순례자'들이 이 마을을 찾게 했다. * 1933년부터 1943년까지 무솔리니의 우상화 선전에 쓰인 금액은 4억 1천만 리라[* 당시 미화 환율로는 약 2천만 달러였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는 약 '''3억 5천만 달러'''다.]였다. * 당시 이탈리아의 교과서 첫 문장에는 '나는 검은 셔츠단을 설립한 위대한 두체와 그의 유일한 후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문구가 적혔고[* 보다시피 [[미사]]의 '신앙고백'의 첫 구절을 본뜬 것이다.] 모든 학교의 벽에는 '무솔리니부터 이탈리아의 어린이들까지'라는 슬로건이 적혔으며 학생들이 사용하는 습지책의 표지에까지 무솔리니의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 무솔리니의 부모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으로 칭송되었고 학교, 병원, 다리, 교회 등에 그들의 이름이 붙었다. * 자신을 '매일 14~16시간을 일하며 새벽까지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지도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잠든 지 한참 후에도 사무실의 불을 켜 놓기도 했다. * 1936년 2월에는 [[에티오피아]] 아두와 계곡에 군인들이 무솔리니의 거대한 두상을 조각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미래의 후손들에게 제국의 창건자를 보여 주기 위해' 로마의 피에트라라타 산의 바위에 150m 크기로 무솔리니의 옆모습이 조각되기도 했다.[* 참고로 전자는 [[1941년]]에 에티오피아인들에게 파괴되었고 후자도 2차 대전 후 [[빨치산]]에 의해 파괴되었다.] [[https://twitter.com/endalk2006/status/1348669965965135873|#1]] [[https://twitter.com/fi_lor/status/1270705360995844096|#2]] * [[1927년]]부터 [[그레고리력]]이 '부르주아적'이라며 [[주체연호]]의 원조격으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취임한 1922년 10월 29일을 파시스트 달력(Era Fascista) 1일로, 1923년을 파시스트 달력 원년으로 삼기까지 했다. * 심지어 무솔리니는 '''그 북한보다도 먼저''' 최고지도자를 [[초능력자]]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1937년 3월에 이탈리아의 신문은 무솔리니가 [[에트나 산]]을 방문하는 동안 용암의 흐름을 막고 [[가뭄]]으로 고통받는 [[리비아]]에 비를 불러일으키는 등 기적을 행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벙어리 소년이 군중 속에서 무솔리니의 연설을 들은 후 말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기도 했다. * 당시 이탈리아의 초등학교는 교육 시간의 20%를 아이들이 '좋은' 파시스트가 되도록 가르치는 데 할애했으며 교사가 이에 따르지 않으면 그 교사는 즉시 해고되었다. 이러한 그의 우상화에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이 세뇌되어 무솔리니 우상화의 전성기였던 1930년대 중반에는 파시스트당의 횡포와 그로 인한 파시스트당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커질수록 도리어 '두체가 알기만 하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를 더욱 공고히 했고 심지어 ''''[[인지부조화|파시스트당에 대한 불미스런 소식은 아랫사람들이 일부러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거짓 보고를 했을 뿐 무솔리니는 나무랄 데 없는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아예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으로 무솔리니의 사진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닌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시절에 무솔리니 면전에서 파시스트 당가 [[조비네차]]의 지휘를 거부한 것을 넘어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무솔리니를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솔리니를 증오한 명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사람은 극히 드문 케이스인 것을 넘어 문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1939년을 기점으로 무솔리니의 인기는 급격히 시들었고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으로 인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수립된 북부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연합군이 통치하게 되었고 1945년 무솔리니가 국민들에게 처참하게 처형된 후 무솔리니의 우상화와 관련된 상징물들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