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상화 (문단 편집) ==== --[[나치 독일]]-- (멸망) ==== >'''나치당이 곧 히틀러이며 독일이 히틀러인 것처럼 히틀러가 바로 독일이다!''' >---- >[[루돌프 헤스]], 1933년 11월 독일 [[국민투표]] 후에 열린 나치당 연례 대회에서 >'''[[그런 거 없다|독일인은 그들이 땅 위를 걷는 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 당시에 무명소졸로 싸웠던 그는 결국 총통의 자리에 올랐고 궁지에 몰린 독일을 구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와 정반대로 흘러가 2차 대전 후 태어난 모든 독일권 사람들은 이전에는 흔한 이름이었던 '[[아돌프]]'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 >1935년에 안네마리 슈틸러(Annemarie Stiehler)가 쓴 '독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야기' 중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자신을 우상화했는데 히틀러는 도로[* 그의 집권 중반 이후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구내에 의무적으로 히틀러 거리가 있어야 했다고 한다.]나 광장, 학교, 경기장, 다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정부 기관의 사무실과 교실에 자신의 사진을 걸게 했으며[* 다만 총리였을 시절에는 마치 스탈린의 초상화가 레닌과 함께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사진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생일은 중요한 공휴일로 지정되어 공개적으로 축하 행사가 열렸고[* 특히 히틀러가 50세 생일을 맞이한 해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1939년]]에는 높은 연단에 올라 독수리와 철십자 훈장으로 장식된 커다란 캐노피 아래서 붉은 플러시 천으로 덮인 '왕좌'에 앉아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10차선의 '승리자의 대로'에서 열병식을 사열하며 그 위세를 과시했고 [[1942년]]에는 본인의 생일 전야제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전설적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생일 축하 기념 공연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교향곡 9번]]을 연주하게 했다. 베토벤 9번의 합창 가사에 쓰인 '[[환희의 송가]]'의 주제가 다름아닌 '''인류의 화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의미에서는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선곡인 셈.] 자신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은 신혼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의무적으로 1권씩 선물하게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숭배해야 할 신에 가까운 거의 초인간적 자질을 가진 천재'로 선전되었고 심지어 어린 학생들에게도 히틀러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시켜 [[히틀러유겐트]]에 모든 독일의 청소년들을 강제로 가입시켜 히틀러를 찬양하게 했으며[* 실제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한때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강제 가입이었기 때문에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몇몇 학교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매일 신에게 히틀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했고 이 '위인에 대한 숭배'를 우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사진 작가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 1885~1957)이 찍은 자신의 사진들을 사진집으로 출판해 탁상용 대형 호화판에서부터 군인들이 휴대하기 쉬운 축쇄판까지 다양한 판형으로 보급하게 했으며 1937년부터 연례행사로 열리던 독일 예술 대박람회에서는 호프만이 촬영한 히틀러의 사진을 묘사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의지의 승리]]와 같은 히틀러 우상화 영화도 만들어졌다. 다만 히틀러는 자신의 동상은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히틀러는 자신이 '미래의 통치자'라며 동상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거의 인물을 위해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히틀러가 죽은 후 히틀러의 동상을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만들고자 한 사람도 [[이디 아민]] 정도밖에 없다.] 물론 히틀러가 패망하고 자살한 후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무관심하다는 반응을 보인 데다 슬퍼 보이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슬퍼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