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예 (문단 편집) == 생애 == 우예는 비록 12세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한 덕에 뛰어난 글솜씨를 갖출 수 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 회계태수 유침(庾琛)의 부름을 받고 회계군의 주부로 임관했다. 우예는 유침 휘하에 머물면서 간언을 아끼지 않았고, 유침 또한 우예를 아껴 그의 건의대로 부역을 감경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유침이 사망하고 기첨(紀瞻)이 부임해 그를 대신했을 때도 계속 주부를 지내다가 공조사(功曹史)로 옮겨졌다.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안동장군부의 종사중랑 [[제갈회]], 참군 유량(庾亮) 등이 낭야왕 [[원제(동진)|사마예]]에게 우예를 천거하니, 사마예는 우예를 불러 승상행참군으로 삼고 기실(記室)을 겸하게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어머니가 사망하여 우예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상을 지냈다. 상을 마친 후에는 다시 관직에 올라 좌저작랑에 제수받았다. 대흥 2년(319년),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들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직언을 해줄 선비를 구했다. 이때 우예는 상소를 올려 인재 선발의 중요성에 대해 간하고, 특히 천하가 혼란한 지금 상황에서는 훌륭한 장수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이후 낭야국상시(瑯邪國常侍)로 옮겨졌다가 비서승, 저작랑을 역임했다. 태녕 2년(324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던 [[왕돈(동진)|왕돈]]이 무사히 토벌되고 조정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우예는 왕돈의 잔당 토벌에 공을 세웠던 것이 인정받아 서향후(西鄉侯)에 봉해졌다. 함화 2년(327년) 11월, 역양내사 소준이 조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建康)의 조정을 장악해버렸다. 건강에서 빠져나온 우예는 고향인 회계로 돌아가 회계내사 [[왕서]]의 의군에 합류해 자의참군이 되었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이 승승장구하던 와중에 전사하고 그 잔당까지 모조리 평정되었다. 우예는 공을 인정받아 작위는 평강현후(平康縣侯)로 승격되고, 관직은 기존의 저작랑 직책에서 산기시랑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산기상시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예는 평소 경서와 역사를 좋아하여 생전에 《진서》(晉書) 40권, 《회계전록》(會稽典錄) 20편, 《제우전》(諸虞傳) 12편 등의 역사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닝보시 출신 인물]][[분류:회계 우씨]][[분류:몰년 미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