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장춘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우장춘 프로필 사진 02.png|width=100%]]}}} || || '''청년 시절의 모습'''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우장춘 프로필 사진 03.png|width=100%]]}}}|| || '''1940년대의 모습''' ||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인 [[우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다. 아버지가 1903년에 [[고영근]][* 우범선이 을미사변에 가담한 걸 평소 고깝게 여겨 우범선을 죽이려고 술자리를 마련해 방심한 틈에 죽였다. 하지만 고영근이 우범선을 암살한 진짜 이유에 관해선 논란이 있다.]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에 가정 상황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 중학생 시절의 우장춘은 인문계열 과목, 특히 국사(물론 여기서 국사는 [[일본사]]를 뜻한다.)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봤으나 [[이공 계열]]인 수학, 과학은 수준급으로 잘했었다고 한다.]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도쿄농공대학|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였다. 실과는 [[학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제국대학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이다.[* 1919년 전국 대학의 단과대학이 학부로 개편됨에 따라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실과가 되었고, 1935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독립하여 도쿄고등농림학교가 되었다. 1944년 도쿄농림전문학교로 개칭하고, 1949년 신학제에 따라 [[도쿄농공대학]] 농학부가 되었다.] 원래 우장춘은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 공과대학이 공학부로 바뀐 것 역시 1919년 단과대학이 학부로 일괄 개편되고 나서다.]에 진학하고 싶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중등학교([[구제중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예과(예비문), 혹은 대학 예과에 상응하는 [[구제고등학교]]를 먼저 졸업해야 했다. 즉 구제고등학교 재학생은 예비 대학생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언제나 고등학교 입시가 입시생과 부모들의 관심사였고 재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구제고등학교가 내지에만 있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못 간 조선인들은 학제상 동급(이지만 격은 비교적 낮게 취급된) [[구제전문학교]]밖에 선지가 없었다. 우 박사가 입학한 농학실과는 본과보다 한 단계 낮은 전문학교에 상응하는 곳이라 중졸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실과나 전문학교 졸업 후에는 제국대학 본과에 편입할 수 있었다.] 농학실과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공대로 갔다면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공밀레로 전쟁 무기 개발에 투입됐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좋은 일인 셈이었다. 여담으로 이런 식으로 공과 쪽으로 간 사람들 중 한 명이 [[이부카 마사루]] [[소니]] 창업주다. 또 다른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도 이공계열이긴 했지만 공학부는 아니고 이학부 물리학과였다.][[https://brunch.co.kr/@r2d21219/16|#]] 1916년 [[도쿄농공대학|도쿄제대 농학실과]]에 입학했을 무렵 우장춘은 본인에게 한국의 혈통이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어느날,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단상에 뛰어올라 "당장 이따위 연설을 멈춰라!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라고 일갈하며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대학]]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김철수는 우장춘이 도지사의 연설 내용과 멱살잡이 사건에 대해 일본어로[* 우장춘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일본인 편모슬하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도지사의 한국어 연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도지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학생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김철수가 멱살까지 잡았는지 정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묻자 "한국어도 모르는 녀석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냐."고 다소 날선 반응을 보였다가 아버지가 조선인이라는 우장춘의 말을 듣고 납득하고 아버지의 성함을 물었다. 우범선이란 이름을 들은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당신의 부친 [[우범선]]은 [[역적]]이고 [[매국노]]요. 당신이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당신이 배운 것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하고 절대로 당신의 조선인의 성을 갈지 마시오.'라고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 준다. 그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우장춘 박사가 먼저 작고할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김철수는 좌익 계열이었던 만큼 이후 인생이 평탄치는 못했다. 그래도 이복동생 [[김창수(1902)|김창수]]가 [[자유당]] 출신으로서 국회의원으로 지냈고,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 덕에 목숨은 건지고 1986년, 93세까지 살았다.] [[http://m.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3319|#]] 이후 1919년에 졸업하였고 농림성(현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에 상응하는 행정 기관.) 산하 연구소에 취직하여 [[나팔꽃]]의 유전에 대해 연구하였다. 1924년에 [[일본인]] 와타나베 코하루(渡辺小春)와 결혼했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모친 사카이 나카의 친구가 똑똑한 우장춘에게 자기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여 우장춘이 그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 친구의 고종사촌동생이 코하루였다. 두 사람은 집에서 당연히 자주 만났었을 테고, 결국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데 코하루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우장춘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코하루는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코하루는 3년 후,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스나가로 성씨를 바꾸고 우장춘은 그 일본인의 데릴사위로서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이름[*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한자 이름은 그대로 '장춘'이다. 이를 일본어로 읽어 長春(ながはる)라고 쓴 것.]을 얻었다. 자녀들도 일본인으로 키우기로 하여 스나가 성을 사용했으나, 우장춘 본인은 계속 우씨 성을 사용했다.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주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 이름은 그가 쓴 영어 논문에도 저자가 '우 나가하루(Nagaharu U)'로 나와 있어 서양에서는 다들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우장춘 박사가 이중적인 의식을 가졌다기보다는 당시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당해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였고, 그러니 국제 학계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본 학술계를 통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서양인들에게는 '장춘'이라는 한국식 이름보다 '나가하루'라는 일본식 이름이 더 익숙하고 읽고 발음하기도 용이했을 것이라는 현실때문일 것이다.] 1936년에는 아래에 언급하는 과학계에서 호평을 받은 논문을 발표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농학[[박사]][* [[일본]]은 [[독일]]과 더불어 박사 학위 취득이 매우 까다로운 나라다. '''특히 문과 계열'''은 한때 [[도쿄대학]] 교수진 중에도 박사 학위를 보유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라고. 그래서 박사 과정만 수료하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중에 논문 등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점 발생으로 인해 2010년부터는 문부과학성에서는 원활한 박사학위 부여를 촉진하고 있다. 하지만 2021년에도 [[영구수료|博士課程満期退学(박사과정만기퇴학) 혹은 単位取得満期退学(단위취득만기퇴학)]]인 대학교수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정도였다.]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공식적인 위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무려 16년 동안 기수(技手)라는 하위직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변적인 연구주제로 간주된 원예 분야만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조선인 성씨인 우를 고집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구소에서도 그가 놀라운 성과를 내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자 그에게 조선 성을 버리는 조건으로 승진시켜주겠다고 회유를 했으나 우 박사가 그걸 거부하여 오랜 시간 승진하지 못했다.] 1937년에 농사시험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후 곧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여 그곳에서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퇴사했으며 이후 4년 반을 실업자로 지내다가 1947년 한국에서 경남도 농림국장 김종의 주도로 일어난 우장춘 박사 환국 운동이 벌어져 1950년에 귀국하였다. 당시의 우장춘은 한국을 확고히 조국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애국심이 투철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의 가족이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우장춘의 환국 동기를 그의 사상이 민족과 국경을 넘어 인류의 복지를 추구한 '과학 휴머니즘'이었기 때문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연구가 가능한 국가의 지원을 따라서 내셔널리티와 무관한 동기로 그의 환국을 이해한다.] 따라서 우장춘 박사의 환국에는 우장춘 박사 환국 추진 위원회를 필두로 한 정부의 적극적인 우장춘에 대한 지원 약속이 꽤나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장춘 환국 추진 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이들은 일본인 소유의 농지를 불하받아 연구 부지를 마련하고 1949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후신이 지금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다. 이 때 [[일본]]에서는 우장춘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여러 수를 동원했으며 그를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리며 귀국을 말렸지만 우장춘은 한 발짝 앞서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 말 그대로 당시 불법 체류자가 된 한국인들을 모았다가 송환하는 곳. 쓰시마에 있었다.]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 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 [[대한민국]]이 우장춘을 그토록 원했냐 하면, 독립 후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을 일부 수정하게 하는 업적 정도면 세계적인 박사 수준이다. 물론 [[우범선]]의 아들이란 찝찝한 핏줄 탓인지 그룰 불러오냐 마냐를 두고는 국회에서 진통이 있었다. 결국 우장춘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입국할 것인가 말 건가 물어보기로 하는 걸로 결론냈다지만 사실상 부결된 거라고 봐도 별반 차이가 없다. 대한민국으로서는 당시 우장춘이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 있던 게 신의 한 수 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한반도에 있던 인재들 상당수가 월북했는데 [[비날론]]을 발명한 [[리승기]] 역시도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월북했다. 이는 당시 북한이 남한보다도 더 교육이나 연구 여건이 좋았기 때문인데다 북한 역시도 이런 인재 영입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장춘은 일본에 있으니, 반미 반일을 국시로 삼는 북한에서는 부르고 싶었다 쳐도 껄끄러워서 부르기 곤란한 처지고 남한에서는 부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100만 엔을 이적비로 우장춘에게 주었다. 현재로는 10억 원 정도의 가치다. 우장춘은 이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이후 한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지내며, [[6.25 전쟁]] 중엔 [[대한민국 해군]] [[정훈(동음이의어)|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했다.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말이야 대우를 해 줬다고 하지만 열악한 한국 사정상 그야말로 자리만 내준 거고,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우장춘이 [[농림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농림부가 돈이 없다며 거절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서 하소연했더니 대통령이 농림부 장관을 불러 질책했기에[* 말이 돈이 없다는 거지 사실은 매국노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와 한국어도 제대로 못쓴다는 이유로 우장춘을 일방적으로 개무시한 것에 가까웠다. 나중에 사정을 들은 이승만이 당시 농림부 장관을 불러 '''"자네는 아직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며 대놓고 쪼인트를 까고 우장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한 일화는 유명하다.] 고생은 심해도 다행히 대우마저 엉망은 아니었다. 다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권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이승만에게도 발급을 도와달라고 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의 수교는 1965년 6월 22일에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외교 관계가 없어서 양국 국민들은 웬만한 이유로는 왕래가 정말 어려웠다. 매일같이 공무원들을 찾아가 여권을 내어 달라고 촉구해도 미수교국에는 가실 수가 없다는 상투적인 대답만 돌아오는 허사 끝에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기대해 볼 대상이었던 것이다.] 끝내 받지 못하고 임종 소식을 들어야 했던 악연도 있는데,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대통령이 일부러 무시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인재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앞 주석에서 말했듯 한국전쟁을 통해 리승기 박사가 월북했는데 그만 월북한 게 아니고 여러 인재들이 여건이 더 좋은 북한을 향해 월북했다. 이러니 남아있는 인재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하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우 박사는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짓고 돌에 새겨진 글씨도 친필로 썼다. 대통령에 의해 [[농림축산식품부장관|농림부장관]]에 내정되었으나 거절하였고, 농가에 수익이 큰 벼와 감자, 무와 배추[* 길쭉했던 토종 배추를 지금과 같이 통통하게 품종개량을 했던것도 우장춘 박사의 업적이었다[[https://theqoo.net/2212804555|#]]. 이외에도 아예 뿌리는 [[무(채소)|무]]이고 열매는 [[배추]]인 형태로 개량하기도 했다. 이름은 '무추'.]등을 개량하기도 했다.[*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에서는 무를 개량한 것과 관해 재미있는 얘기가 실려있다. 한 연구원이 들려주기를, 울산의 어떤 선비가 벼슬을 얻어 서울로 올라갈 적에 고향에서 먹던 무 맛이 기가 막혀 하인을 보내 그 무를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들은 우장춘 박사는 그 무를 찾아와달라고 부탁하였고 연구원이야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이라고 응대했지만 우장춘 박사는 그런 얘기가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고집을 부려 해당 지역의 무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무 맛이 실제로 꽤 괜찮아서 이것을 바탕으로 개량에 나섰다고 한다.] 또한 제주도, 거제도, 욕지도 등 남부 지역에서의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실제로 결과가 뛰어나 현재 감귤 산업이 바로 우장춘의 공로다. 1959년, [[국립중앙의료원|국립의료원]]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신경통을 이겨내기 위해 진통제를 자주 많이 복용한 것이 해가 되었다.]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했다. 사망 몇 시간 전 [[포장(상)|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병상의 우장춘 박사에게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었다. 우장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그의 묘소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농촌진흥청]][* 현재는 전주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으며, 구 농촌진흥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선거연수원으로 사용 중이다.] 뒷편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