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장춘 (문단 편집) == 일화 == 우장춘이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부산항으로 환국했던 당시에 김병규 위원장은 "우리는 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며 그의 귀환을 뜨겁게 반겼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돌아와 주셔서 고맙소"라는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우장춘은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며 귀환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그의 정체성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자, 우장춘의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그가 생애 막바지를 한국에서 보냈던 시기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기도 했는데, 정치인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도리어 냉대를 받기까지 했다. 일단 출신부터가 한일 혼혈인데다 그 아버지는 상기한 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우범선]]이었다.[* 이 때문에 우장춘을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도 정계에서 거셌지만 김병규를 비롯한 지지자들은 [[을미사변]] 당시 세상에 나지도 않았고 달리 친일 행위를 하지도 않은 우장춘을 단지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우범선이 저지른 짓들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맞섰고 결국 이 주장이 어렵게 이긴 덕분에 우장춘은 귀국했다.] 게다가 [[일본]]에 오랜 시간 있었던 데다, 본인이 언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연구를 중요시했기에 한국어가 간단한 읽기나 듣기만 가능했을 정도로 서툴렀고[* 이것도 한국에 와서 몇 년 살아서 그 수준이 된 것이며,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상 대화나 강의는 모두 일본어로 하였다. 그나마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시기고 어린 시절부터 일제 치하에 살던 사람들도 많아 상호 일본어 대화 자체는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장춘 본인은 한국어를 배울 시간에 한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장춘은 아버지도 없이 어릴 때 가난 탓에 어머니와 헤어져 고아원에 살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을 리가 만무함을 생각해야 한다.], 이 때문에 단지 한국어를 못한다고 무시하는 정치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일례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의하거나, 상기한 이유로 그를 무시하며 연구 예산을 제공하지 않으려던 농림부 장관에게, '''"자네는 젊은데 벌써부터 노망이 났나?"'''라고 호통을 치고 우장춘에게 예산을 내어주게 한 적도 있다. 반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국사]] 최초의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점 때문에 우장춘의 추종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인근의 여학생들이 연구소 앞에서 대기하다가 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때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는 일화도 있다. 우장춘의 연구소에는 우장춘의 명성을 듣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보수와 근무조건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싶었던 사람이 많았다. 그는 차별화된 전문성을 지닌 연구조직을 효과적으로 구성하고 연구 시스템의 세대 전승을 위해 노력하였다. 연구소의 제자들에게 "눈빛이 식물의 잎을 뚫어 그 뒤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연구자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물의 상태를 한눈에 꿰뚫어 그 내면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하면서 오직 후학 양성과 육종 연구에만 몰두한 우장춘은 연구소 책임자임에도 항상 작업복과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생활하여 '고무신 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유의 우직한 성품으로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어서 별명이 '[[불독]]'이었다. 게다가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오만]]하게 비춰질 정도로 과묵한 사람이었다. 대신 그런만큼 공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성격이어서 주변인들에게 늘 호평을 받았다. 가령, 자신의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 일부가 [[6.25 전쟁]] 발발 후 입대 명령을 받자, 우장춘이 직접 윗선에 연락해서 그들의 군면제를 청탁해서 성사시켰다.[* 당연히 국방부에서는 청년들이 수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군인들도 먹어야 전투를 하고, 이 연구원들이 군인들이 먹을 식량 증산과 공급에 기여중인 사람들이라고 거듭 설득했고 결국 승인되었다고 한다. 이 일은 훗날 이공계 박사를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대체복무시키는 [[전문연구요원]]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우장춘의 도움으로 위험한 전장에 가지 않아도 된 연구원들은 그를 따라 밤낮없이 일해야 했다. 문제는 이 소식을 들은 정치인이나 기타 유력자들이 자기 아들에게도 똑같은 청탁을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살던 이복누나[* 아버지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이전에 [[한국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까지 조카를 데려와서 군면제 청탁을 부탁하자 발끈해서 '''"[[개념인|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재능이 없으면, 그냥 군대 보내십시오.]]"'''라는 말로 일관하며 쫓아냈다. 한국에서는 '현지처'를 두고 살았다는 말이 떠돌지만, 와전이다. 남편과 사별한 어느 중년 여인이 우장춘을 존경하여 그의 [[우렁각시]] 노릇을 했고, 우장춘이 일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재혼을 거부했는데도 계속 그의 살림을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 소문이 바다 건너 아내에게까지 전해지자 아내는 아이들이 독립하면 한국에 와서 같이 살려고 했던 생각을 접었고, 남편의 위독 소식을 듣고 나서야 한국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이때 간호사로 위장해서 우장춘과 면회했는데,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간의 묵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냥 살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였을 뿐인데 일본에서는 현지처로 와전되어버렸다고 한다. 사망하기 3일 전에 병상에서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한 말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는구먼.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장춘은 [[민족반역자]] [[우범선]]의 아들이고, 당시 신생 독립국가였던 상황에서 전쟁까지 치렀던 [[대한민국]]의 어려운 사정상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뒤늦게나마 그의 공로를 인정하고 훈장을 수여했으나, 그의 심정이 착잡하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평생을 대단한 [[애국자]]로 살아 갔던 인물로, [[일본]]에서 성을 바꾸거나 하며 조금만 굽히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버리고 조선, [[대한민국]],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열심히 일했다. 일본 정부는 [[토마스 칼라일|우장춘을 대마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설이 돌 정도로 우장춘을 보내기 싫어했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일본에서 생활했으면 상당한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개인 연구에 투자해 지금보다 학술적으로 개인 경력에서도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적으로는 가족과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포기한 것. 게다가 순수 한국인도 아닌 한일 혼혈이고, 일본 태생이기 때문에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우장춘의 어머니가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장춘을 조선인으로 키운 덕택. 심지어 도쿄제대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유학생 신분으로 진학했다. [[http://kids.hankooki.com/lpage/study/200502/kd2005022215323345690.htm|#]] 이승만이 그를 농림부장관에까지 내정했는데도 과학자로서 묵묵히 일했다. 우장춘이 존경받는 이유에는 이렇게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오로지 과학자로서의 연구에만 몰두한 것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의외의 취미로 그는 [[바둑]], [[화투]] 등의 게임을 아주 좋아했다. 화투에 몰두한 나머지 일본의 [[코이코이]]를 변형한 [[고스톱]]으로 만들어 한국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단순히 그걸 유희로만 즐긴 게 아니라 바둑과 화투 등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확률의 연구에도 관심이 있어, 일본에 있던 시절에는 화투 족보의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책을 내려다가 농업시험장 상관이었였던 데라오 박사한테 혼났던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 우 박사는 이미 소학교, 중학교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을 정말 잘해서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리적 지능이 비상한 인물이었다.] 반면 술은 정말 못 마셨다. 우장춘이 아직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 어머니 사카이 나카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중히 여겨서 하루는 아들에게 [[술 강요|강제로 술을 따라주어서 마시게 했는데]], 어머니와 강제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한두 잔 마시고는 그대로 뻗어버린 탓에 어머니가 대노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카이 나카는 [[메이지 시대]] 극초반인 [[1872년]]생이었는데,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이 그보다 겨우 4년 전인 [[1868년]]에 일어났었다. 즉 한창 근대화가 진행 중인 시기에 태어난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근대화의 물결이 혼재된 시대를 살았고, 이런 어머니가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에서 남들에게 이지메당한다"라고 걱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술 강요 문화가 거의 없어진 한국과 달리 일본은 지금까지도 보수적인 문화가 남아 있어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는 판국인데 하물며 그 시절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인관계에 힘쓰도록 충고한 어머니의 말을 잊지 않아서, 그가 한국에 정착하고나서는 최소 한 번이라도 서로 인사라도 하라는 의미로서 연구소에서도 아침 조회는 무조건 참석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