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파니샤드 (문단 편집) ==== 마야(maya), 무명(無明) ==== 우파니샤드에서는 사람이든 무엇이든 한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다시 태어나 살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은 배우가 연기를 하듯, 사람이 살아가는 무대인 것이다. 배우가 연기에 몰두하다 보면 [[메소드 연기|자신의 본모습을 잊고 스스로 그 배역에 심취]]하듯, 사람도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본모습을 잊고 그 역할에 심취한다. 그러나 배우도 연극이 끝나면 자기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집으로 간다. 그 집을 우파니샤드에서는 바로 우주의 본체이며 영혼인 [[브라흐만]]이라고 부른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세상이 연극 무대처럼 진짜 집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환영(幻影)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마야(maya)'''라고 하는데 우주의 본체이며 창조의 근원인 브라흐만이 만들어놓은 그물망이라고도 하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한다. 거기에 이 세계는 브라흐만이 주관하는 마야에 의하여 발생하는 현상[* 혹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신격 존재인 브라만 자신의 의식이 스스로 투영되어 나타나는 허상이자,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인간으로 하여금 환상을 믿게 하는 힘. 이 마야는 현상세계가 진짜라는 우주적인 환상을 생성하는 강력한 힘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불이일월론 학파에서는 마야는 무한한 브라흐만이 유한한 현상세계의 모습을 띄게 하는 우주의 힘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이며[* 베단타 학파에서는 가상 또는 환영으로 본질/진리가 현상세계에 일시적으로 재현된 개념이라고 한다.] 절대신의 신성하고 신비한 마술적 힘으로 간주되거나 우주생성의 자궁, 창조와 파괴 그리고 균형의 세 가지 속성이 있는 신성한 여신으로 여기고 달리 현상의 세계를 일컫는 말이자[* 그렇기에 마야는 '우주'라는 의미로도 간주된다.] 물질적인 존재들의 순간적인 현상들을 보여 줄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면서도 비실체와 실체가 상보공존하는 모든 우주이고 가끔 무명의 동의어로 우주의 질료인과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불교에서는 심(心)작용의 하나라고 하여, <기만>, <배반>을 의미하며, 또한 <사람을 현혹하는 힘>, <환상>을 의미하고 사물에 실체가 없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고 한다. 락슈미와도 연관된 개념이기도 하다. 마야는 환영이나 현상이 아니라 힘이며, 신은 그 것으로 자신의 힘의 구현인 동시에 물질화인 현실의 우주를 창조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브라흐만은 이 마야를 통해 끊임없이 시·공간적 세계를 창조했다고 한다. 세계의 다양함과 자연현상, 그리고 참된 실재가 아님을 뜻하기도 하며, 이 마야에는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생성]]한 라쟈스 마야, [[우주]]를 유지하는 사트바 마야[* 라쟈스와 타마스 사이에서의 균형을 잡아주는 유지력과 같은 것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별들이 저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며, 생명이 자라고 계절이 순환하는 것은 이 사트바 덕택이라고 한다.], 우주를 파괴하여 갖가지 재앙을 일으켜 생명을 멸하게 하는 타마스 마야 총 3가지 성질을 지녔다고 하는데,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인간, 식물, 생물, 모든 무생물들)은 이 세가지 성질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브라흐만은 이 마야를 통해 호흡을 하는데, 브라흐만의 [[호흡]]은 [[창조]], [[유지]], [[파괴]]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마야에는 '우주적 환영체'와 '개별적 환영체'라는 총 2가지의 형태로 가시화된다고 한다. 우주적 환영체는 브라흐만이 [[창조신]], 유지자, 파괴자(악마)로 둔갑하여 나타나는 것이고, 개별적 환영체는 브라흐만이 아트만으로써 산이나 나무,돌,식물, 인간의 육체 등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로 분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야와 브라흐만(=아트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야는 브라흐만 속에 본래부터 내재된 브라흐만의 창조에너지의 가시화된 형태이다.] 브라흐만에 현상계를 현현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브라흐만이 개체적인 형상들로 이루어진 현상계로 현현하는 브라흐만이 지닌 복합적인 환력(幻力)이라고 한다. 그리고 니르구나 브라만은 이 '창조의지'(=브라만의 창조에너지)[* 그러면서 그 의지에 의하여 만들어진 현상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라 할 수가 있는 마야를 통해 분화력으로 수많은 혼들(아트만들)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흡사 무에서 유가 생성된 것과 같은 이치이고 만물이 브라문의 분화인 아트만이 된 것을 뜻한다.] 아트만은 이 마야에 의하여 통제를 받게 받게 되며, 마야에 의해 통제받는 아트만은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 인과법칙 등 상대적인 것들 속에서 생사윤회에 있게 된다고 한다. 비이원론자들은 이 마야를 가리켜 '무한한 브라만을 유한한 현상의 세계로 나타나게 보이는 우주적 힘'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마야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상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마야는 환영으로 이루어진 물질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브라흐만의 인격화된 형태인 이슈와라의 영향력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고[* 마야와 브라만은 인격신 이슈바라라고 불린다고 한다.] [[마음]]과 [[물질]]의 기초를 이루는 우주적인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마야는 한때 [[바루나]]가 관장했다고 하는 르타(rta)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르타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마야는 '최고신의 특권인 형태나 존재를 창조하는 우주적 마야'였다고 한다. [[리그베다]]에서 마야는 '의도적인 변화', [[창조]]나 [[파괴]]의 [[교체]]를 뜻하며, 우주적인 환상, 비실재, 비존재로서의 의미로 쓰여지기 전까지는 한때는 우주적인 개념의 '변화', [[바루나]]의 주술 혹은 악마적인 변화와 창조력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바루나]]가 이 마야에 의해 우주질서를 재건립할때 사용했었다고 한다. 이 마야는 우주질서의 아감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거기에 브라흐만의 주술적 힘에 의한 우주창조적 힘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꿈'이라는 개념으로 동화되었다고 한다.[* 외부세계의 여려 형태의 실재들은 꿈들의 내용만큼이나 환상적임을 의미한다. 만일 존재가 영원한 단일체(unity)이면 사물(우주)의 다원성 뿐만 아니라 정신의 다원성 또한 모두 이 환상(maya)에 해당된다고 한다. 상카라이전의 베단타학자인 가우다파다는 아트만의 다원성은 전적으로 이 마야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무지 혹은 우주적 [[환영]]으로써의 마야는 브라흐만을 감추는 베일을 씌우고, 또 우리 인간의 [[통찰]]도 어둡게 함으로써 우주적 [[근원]]에 도사린 유일한 하나의 실재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다양한 현상세계만을 바라보게 한다고 하며, 이러한 마야는 무지와 앎이라고 하는 2가지 측면을 지니는데 '무지'는 우리를 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보내 세속적 물질적 감옥에 가두면서 욕망과 탐욕에 빠지게 하며, 반면에 '앎'은 신적 실현(신의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며, 영적인 미덕을 찾아 수행하게 한다고 한다. 이러한 2가지 측면은 [[시간]]과 [[공간]], 인과성에 따라 작용하기에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인 브라흐만을 깨닫는 것으로만 상대적인 [[무지]]와 앎 모두를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마야는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풀이 되며, 힌두교도인들이 현상의 세계를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며, 물질적인 존재들의 순간적인 현상을 보여줄 수가 있는 능력이자,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의 모든 현상라고 한다. 그러나 마야를 환영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환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세상은 영구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잠시 사용하는 공간'''일 뿐이라는 뜻이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본체이고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지만 세상은 늘 변하고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환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아는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성정하고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가 만들어내는 변화이자 그 형태이며, 곧 환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 우주의 상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는 마야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가 된다고 한다. 불교 또한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며, 그렇기에 '쉬지 않고 움직인다'란느 의미로 삼사라(samsara), 즉 [[윤회]]라고 부르며, 중국 철학에서 또한 우주의 작용를 유동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재라는 의미로 도(道)라고 부른다고 한다.(이처럼 힌두교와 불교,도교 모두 공통적으로 세계는 운동, 유동과 변화에 의해 이해가 되고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특질 중 하나로 동적성질을 지녔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고있는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자만'하거나 반대로 '자포자기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혜가 부족한 사람, 즉 무지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 avidhya)[* 무명은 수능 윤리와사상 과목에서 불교철학과 관련해 단골로 나오는 문제인데, 선지 중 '무명을 지향한다' '무명을 추구한다' 등의 선지는 당연히 틀린 것이다.]이고 무명은 우리 눈을 가려 자신의 참모습, 우주의 근원을 볼 수 없게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이것은 거울과 같이 맑은 마음에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지혜를 담아야만 없앨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