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한시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중국 우한 쑨원.jpg|width=100%]]}}}|| || 1911년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 기념관. [[쑨원]] 동상 뒤 [[철혈십팔성기]]가 펼쳐진 건물은 당시의 임시 혁명정부 청사였다. || 도시의 기원은 [[상나라]] 때 세워진 걸로 추정된다. [[삼국지]]의 [[손견]]이 사망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나라]] 대에는 장샤군 소속이었으며, 지금도 우한시 장샤구 지명으로 남아있다. [[형주 공방전]]으로 형주가 위와 오로 분리되자 오나라는 자국 영토의 장샤군 일부에 우창현을 두었고 손권과 손호가 천도를 하기도 했다. 다만 해당 우창현은 현재 우한 도심이 아닌 동남쪽 외곽인 [[어저우]] 일대이다. 서진시대 이후 우창현 부근 현 우한 일대는 우창군으로 떨어져나간다. 지금의 우한 시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우창현에 기원한다. 두 우창이 한자가 같은데다 연관성도 있기에 쉽게 헷갈린다. 남송 시대에는 양양[* 강남에 위치한 정권에 있어 요충지였다. 일찍이 손오 최후의 명장 [[육항]]이 형주를 중시했다.]을 비롯한 남송의 요충지 중 하나였고, 악주[* 정확히는 우한 시 우창 구]라고 불렸다.[* 서쪽으로는 사천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고, 동쪽으로는 양회 지역을 지원할 수 있었다.] [[악비]]가 금나라로부터 중원 회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었고, 개경 원년(1259년) [[가사도]]가 이곳에서 [[악주 전투]]를 지휘하였고, [[충칭]]에 있던 [[여문덕]]의 군대도 이곳으로 향하여 악주를 방어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창 중국.jpg|width=100%]]}}}|| || 19세기의 지도. 우창현 (Wu-chang)이 2개 있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한자까지 같았다.[* 하지만 신해혁명 후 동쪽의 우창은 옛 당송대 지명인 악주를 취하여 [[어저우]]가 되었고, 서쪽의 우창은 한구 및 한양과 합하며 우한이 되어버려 현재 우창이란 지명은 우한시 우창구에만 남아 있다.] || 한편 우창은 [[신해혁명]]의 진원지로 [[청나라]] [[만주족]] 황조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곳이기도 하다. [[1911년]] 이 도시의 전신인 우창에서 일어난 우창 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봉기의 이유는 청 황실이 철도 국유화를 감행하려 하자 '''[[보로운동]]''' 즉 철로를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으로 번진 것이었다. 이후 군벌 [[우페이푸]]가 장악하여 그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1년부터 노동운동이 성행했으나 1923년 [[2.7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됨으로 1926년 10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상계군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장제스]]가 우한 천도론을 주장해 11월 우한 천도가 결정되었지만 공산당, 국민당 좌파, 탕성즈가 연합하여 반장운동을 벌이자 장제스가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난창 천도를 주장해 [[천도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3월에 정식으로 [[우한 국민정부]]가 출범하였으나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세운 후 난징 정부와 대립하다가 장제스 사퇴를 조건으로 [[영한합작]]이 이루어져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에 통합된다. 이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점령하려 안후이성으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다가 [[리쭝런]], [[바이충시]]에게 토벌당한 후 잠시 [[계계군벌]]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이후 국민정부에서는 [[광서파]], [[서산회의파]], 개조파 등이 알력을 벌이다가 결국 장제스가 복귀했고 장제스는 우한을 다시 우창, 한커우, 한양의 우한 3진으로 환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커우가 국민정부의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승격하는 등 우한 3진은 중국의 중요한 대도시로 남았다. [[국민당의 2차 북벌]]까지 마무리된 이후 장제스가 계계군벌 견제를 위해 [[루디핑]]을 후난성 정부주석에 임명해 루디핑과 광서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광서파가 [[호남 사건]]을 일으켜 [[허젠]]을 후난성 정부주석에 임명하고 루디핑을 파면하면서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반장전쟁]]으로 번진다. 여기서 장제스가 승리해 계계는 우한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만주사변]]과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을 통해 일본의 침략 야욕을 파악하게 된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공업기지 육성에 나섰다. 이때 장제스는 내륙 깊숙히 위치한 우한을 일본의 침략시 맞서 싸울 거점으로 계획하고 우한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12월에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국방최고위원회와 여러 주력 부대가 우한으로 퇴각해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다.[* 공식적인 [[임시수도]]는 이때도 [[충칭]]이었으나 사실상 우한이 수도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0A10p1ksOMs)]}}}|| || 1938년 우한 전투 당시 모습. 포격하는 [[일본 해군]] 강방함대, 일본 함선들을 노리고 폭격하는 중국 공군, 돌격하는 [[일본 육군]] [[보병]]대의 모습이 담겼다. || 하지만 1938년 10월, 우한 또한 결국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일본 육군 11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중지나방면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쓰촨성]] 등 서남부 지역으로 가까스로 옮긴 극소수의 공업시설만을 가지고 일본과 맞서 싸워야 했다. 일본군이 항복한 후 우한은 국민정부의 손에 들어갔으나 국공내전 후반부인 1949년 5월 우한 3진을 장악한 [[중국공산당]]은 우한 3진을 통합시켜 우한 3진은 최종적으로 우한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중화민국]]은 [[국부천대]] 당시의 본토 행정구역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도 [[대만/영유권 주장 지역|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상으로는 한커우 직할시와 우창 시, 한양 현의 3개 도시로 되어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 조반파와 보수파 [[홍위병]]들의 내전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일대 혼란의 장이 되었으며 [[7.20 사건]]이 일어나 중국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한커우는 명조 중경 이후에 자연발생한 도시이며 역사는 비교적 짧지만, [[명나라|명]]조 말기에는 한양과 우창을 능가하는 큰 상업도시가 되어 장강 중류의 물류, 상업의 중추로서 성장하였다. 그 후 [[청나라|청]]대에는 한커우진은 [[서산]] 상인이나 [[섬서]] 상인, 휘주 상인(신안 상인) 외 각지의 상인이 모이는 상업도시가 되어, [[장시성]]의 [[경덕진]](景徳鎭), [[허난성]]의 주선진(朱仙鎭)(현재의 [[카이펑]] 시 부근), [[광둥성]]의 [[포산시]](佛山鎭)와 함께 《4대 명진》의 하나로 불렸다. 1891년에는 한양에 한양조병창이 설립되어 총기의 생산을 맡게 되었다. 주로 독일제 총기를 라이센스 생산하였는데 [[게베어 1888|Gew88]], [[MG08]], [[마우저 C96]], [[게베어 1898|Gew98]]등의 총기를 생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