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릉군/역사 (문단 편집) === 안용복의 도항과 쟁계 === 하지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625년부터 1691년까지 66년 동안 오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가문에게 매년 번갈아 도해면허가 발급되면서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업을 일삼았고, 마침내 1692년에는 조선인 어민과 충돌하여 아무런 소득 없이 귀환하였다. 이들은 이듬해인 1693년에도 같은 일이 발생하자 [[안용복]] 등을 일본으로 잡아갔고, 이들을 조선에 송환하는 과정에서 쓰시마 번주 소오 요시쓰구(宗義倫)는 다치바나 마사시게(橘眞重)를 보내 "다케시마에 조선 배가 드나들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상의 영토 요구에 대해 남인의 온건대응론이 대세를 차지한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인 울릉도라도 못 가게 하는데, 하물며 다른 섬이야 당연하다"는 답서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즉 '다케시마는 어디 붙은 섬인지 모르겠지만, 다케시마가 어찌되었든 울릉도는 우리 영토'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이 부분에 대해 다시 마사시게가 파견되어 답서에서 울릉도 언급을 빼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이미 1694년 갑술환국이 벌어진 조선 조정은 강경대응론으로 선회하여 오히려 전에 보낸 답서를 취소하고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한 섬을 두 이름으로 부른 것이니, 일본 사람들이 오가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답서를 새로 보냈지만 마사시게는 그 뒤로도 10개월을 버티며 답서의 수정을 요구했다.[* 시위의 일환으로 조선 정부에서 공급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부하는 바람에 돌아갈 때는 거지꼴이었다.] 그러던 중 1695년 요시쓰구가 죽고 소오 요시미치(宗義方)가 새로이 쓰시마 번주가 된 가운데, 마사시게는 본국에서 자신을 소환하자 한동안 조선 조정과 논쟁을 벌이다 마침내 [[열폭]]하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해 12월 돗토리번에 다케시마와 마츠시마(독도)의 일을 문의했던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는 이듬해인 1696년 1월 소오 요시미치가 입근한 자리에서 "다케시마는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볼 수 있으므로,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알리도록 했다. 한편 안용복은 이러한 정황에 힘입어 사람들을 규합하여 울릉도와 자산도(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꾸짖어 내쫓고, 나아가 자신을 포함한 11명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호키(伯耆)에서 번주와 만나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는 엄중 처벌하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간 이러한 일본 측의 도해 금지 결정이 조선 측에 통보된 뒤에도, 조선 조정의 답신 여부와 그 내용을 두고 한동안 이어지던 이 문제는 1698년 조선 조정의 답신이 쓰시마 번을 통해 에도 막부로 전달되고, 다시 1699년 쓰시마 번의 답신이 조선 조정으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종료되었다. 또 여담이지만 [[18세기]] 후반, 서양 선박들이 동해를 탐사를 하기 시작을 하면서, 지도에 [[울릉도]]를 '''다줄레(Dagelet)'''로 지도에 적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