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지경덕 (문단 편집) == 활약 == 처음에는 송금강 휘하의 장수로 지내 619년 12월에 당군이 하현에 있는 여숭무를 공격하자 심상과 함께 협공하여 당군을 격파하였으나 회주로 회군하였을 때 대패하였고 또한 하동의 왕행본을 지원하러 갔지만 [[태종(당)|이세민]]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도망쳤다. 당에 항복한 여숭무가 공격하는 것을 알고 그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기 620년에 [[유무주]]와 송금강을 격파하자 심상과 함께 개휴, 영성을 바치고 당에 항복하지만 심상이 배반하자 장수들의 의심을 사지만 이세민이 이를 믿어준다. 좀 더 세부적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이세민 진영에 합류한 심상이 먼저 도망갔다. 그러자 [[굴돌통]]을 위시한 이세민의 기존 가신들은 심상과 함께한 전력이 있던 울지경덕 또한 도망갈까 의심했다. 울지경덕은 용력이 대단하고 전투에 능하니 이대로 도망가 적으로 만나면 골치아파질 것이라 여기고 감옥에 그를 가두어 버렸다. 이세민에게 별도의 보고 없이 가신들끼리 임의로 모의 작당하여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가신들은 더 나아가 일이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바, 울지경덕은 당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졌을 것이므로 반드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결론 지었다. 그러나 사형만큼은 자신들 임의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이세민에게 보고한 후 진행하려 하였다. 보고를 들은 이세민은 깜짝 놀라 울지경덕이 도망갈거면 심상보다 먼저 갔을 것이라며 가신들의 의견을 일축한다. 그러면서 울지경덕을 즉시 석방하고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그에게 금을 주며 아래와 같은 말을 한다. (참고로 침실로 불러들인 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상대에게 대단한 신뢰를 보인 다는 뜻이다) >"대장부의 뜻과 기개는 서로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작은 혐의는 마음에 두지 마시오! 나 또한 참소하는 말을 들어 충성스럽고 훌륭한 자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공은 이를 뼈 속 깊이 새기시오! 하사하는 금은 그동안 잠깐이나마 함께 했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함으로 반드시 떠나고자 한다면 노자로 쓰도록 하시오" 이듬해 9월 21일에 위의 무릉선에서 [[왕세충]]군의 공격으로 이세민이 포위되어 [[선웅신]]이 이세민을 공격하자 선웅신을 물리쳐 포위에서 벗어났으며 621년에는 이세민을 따라 다른 장수들과 함께 흑의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격파하고 3월 25일에 무뢰를 거쳐 26일에 [[두건덕]]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세민과 함께 이동하여 왕세충군, 두건덕군과 싸울 때 2명의 장수를 이끌고 왕세충의 조카인 왕안을 사로잡고 그가 가진 명마를 빼앗아 이세민에게 바쳤으며 왕세충, 두건덕의 멸망에 공을 세웠다. 622년 9월에 [[유흑달]]이 난을 일으켜 [[이세적]]을 포위하여 지원했지만 포위당하자 장사들을 이끌고 이 포위망을 뚫었고 7월에는 돌궐이 삭주를 노략하여 이고천이 패하자 이를 구원하였으며 624년에는 농주에서 [[돌궐]]을 격파하였다. 통일을 이룩하자 좌이부호군에 임명되고 [[이건성]], [[이원길]]이 자신의 편에 올 것을 설득하자 이를 거절하였으며 [[현무문의 변]]이 일어날 때 70기의 [[기병]]을 이끌고 이원길을 [[활]]로 쏘아 죽이고 이세민이 황제에 오르자 우무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8월 25일에 경주도행군총관이 되어 돌궐군을 경양에서 격파하고 그 장군인 아사덕오몰철을 붙잡았으며 이후에는 광록대부에 임명되었다. 활약상이 이어지다보니 거만해져서 황실 종친인 [[이도종]]을 두고 네가 뭔데 내 상전 행세냐고 두들겨패는 대형사고를 친 적이 있었는데, 이세민도 대노해서 '[[한고조]]의 공신 중 몸이 성했던 자가 없었다기에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야 '''[[한신]]이니 [[팽월]]같은 자들이 목이 달아난 게 누구 잘못인지 알겠다'''.'라고 은연중에 계속 그러면 이 둘 꼴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고 식겁한 울지경덕도 이후로는 얌전히 지냈다고 한다.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시도하려고 하자 직접 출정하지 않고 한 쪽의 군사를 보내자고 하였지만 이를 듣지 않았고 그의 명에 따라 좌일마군총관에 임명되어 따랐으며 고구려 원정이 실패한 이후 한가하게 지내다가 74세로 659년에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