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웅진도독부 (문단 편집) === 건안성으로 옮겨진 후 발해에 의해 소멸되다 === 670년부터 [[문무왕]]은 대대적으로 백제의 고토를 공격해 당나라를 축출해내는데 성공함에 따라 웅진도독부는 철폐되고, 기구 자체는 백제와 별 관련이 없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요동 지역의 [[건안성]]으로 명목상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는 하남 일대에 잠깐 사민했던 백제 유민 대부분을 다시 건안성으로 옮겨 부여융 휘하에 배치했으며, 이곳에서도 부여융은 백제 멸망 직후(660년) 당나라로 강제이주당한 백제계 유민들 약 10,000명을 통치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흡수의 전초기지 목적을 가지고 야심차게 출범시켰던 웅진도독부는 만주 내 백제 유민들의 자치기구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되지만, 이 웅진도독부는 뜻하지 않게 대조영의 발해에게 끝장나게 된다. 《신당서》와 《통전》 등을 보면 당이 684년 ~ 704년 어느 시기에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봉했지만, 웅진도독부가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모두 잠식당해 없어져 형식적인 조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발해말갈'은 698년 건국된 [[발해]]니, 결국 건안성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는 고왕 대조영이 통치하던 시기 발해군에게 공격당해 없어진 게 분명하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간 《백제 유민》편 참조] 당나라가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를 옮긴 주된 이유는 백제인 병력을 당나라를 위해 활용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웅진도독부가 당나라의 의도대로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운동 진압에 동원되었다가 대조영의 군세에게 멸망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다만 웅진도독부 군사들이야 대조영에게 궤멸당했다쳐도 사비성 함락 당시 끌려나왔던 이들인 그 나머지 유민들의 행방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소고구려가 설치될 때까지 있었으면 언급이 없었을 수가 없는데 그런 말 없는 걸로 봐선 전부 발해군에게 몰살당했거나,[* 이쪽은 가능성이 떨어진다. 전근대 병기는 살상력이 그렇게 높지 않아서 근현대 전쟁사에서 있어왔던 대규모 학살은 물리적으로 힘들고 국력증강을 위해 이미 항복한 인력은 웬만해선 흡수하는 게 일반적이다.] 발해의 내지로 끌려가거나 둘 중 하나다. 다만 백제부흥군에게 나름 골탕을 많이 먹었던 신라마저도 백제부흥군을 가급적 죽이지 않고 신라 부대로 편성해서 같은 백제부흥군 진압에 활용하거나 나당전쟁 때 당나라와의 투쟁에 활용했던 전례를 봐선, 이 시기 대조영의 발해군이 한때 백제 왕성 사비성 출신의 애꿎은 양민들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많이 낮다. 더군다나 발해와 백제는 서로 원한도 없을 뿐더러 언어와 문화가 어느정도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가뜩이나 건국 초기 인구가 부족한 마당에 죽이는 헛수고를 할 바엔 구 백제 왕도 출신이자 당나라의 생활까지 경험한 이들을 발해에 동화시켜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을 듯 하다. 따라서 발해로 잡아 압송하고 사민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이렇게 백제 유민 가운데 일부는 신생국 단계의 발해에 합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제인 일부는 뿌리인 고구려로 다시 돌아간 셈이 되었다. 더 나아가면 발해 멸망 때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된 발해 유민들 중 이들의 후손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돌고 돌아 다시 옛 백제땅까지 돌아간 후손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