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이순신과의 갈등 ==== '''원균의 본격적인 문제점'''은 이순신과 합류하고 난 뒤의 모든 행동이다. 경상우수영을 건사 못한 건 전근대 현실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이순신에게 합류한 뒤 칠천량까지 보여준 모든 행동은 어떤 기준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행과 무능으로 점철되어었다. [[옥포 해전]] 이후 [[조정]]에 공적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는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게 된다.[* 특히 옥포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는 1명 부상이었으나, 전후 원균이 전공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2명에게 상해를 입히면서 옥포 해전에서 조선 해군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장수가 됐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자,[* 원균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지휘권에 도전하는 등 [[쓰레기]] 행각을 계속 벌인다. 이는 옹호의 여지가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애시당초 경상 우수영이 조선에서 가장 큰 수군 기지이고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사는 모두 경상우수사가 겸직한 점을 보면 진작 원균이 적당히만 잘 했어도 그 삼도수군통제사는 자신이 앉을 자리였던 것이다. 자기가 삽질로 조선 최대 수군전력을 날려먹고 뒤에서는 그나마 전력을 온전히 가져 삼도수군 통제권을 가진 이순신을 시기하는건 현대의 관점에서도 이성적이게도 감정적이게도 옹호받기가 힘들다.] 조정은 [[1595년]]에 원균을 충청 병사로 발령을 냈다. 정3품 수사에서 종2품 병사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그런데 원균은 오히려 이순신이 자신을 충청도로 쫓아냈다 생각하여 패악질을 일삼았다고 한다.] 충청 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된 후에 [[비(날씨)|비]]가 내리는 바람에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 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조선)|선조]]와 [[비변사]]는 원균의 이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하지만 [[경상도]]의 주요 항구 및 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건축)|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 물론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전쟁 첫해 부산포로 한번 쳐들어가서 이긴 적은 있지만]], 그 때는 왜군이 성을 쌓아 육상에서 해로를 감제하기 전이므로 같은 방식이 또 통할 수가 없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하였음을 알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2023_003|실록 1597년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2월 10일(이미 조정에서는 2월 6일에 체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전달할 선전관이 도달하기 전이었음)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머물렀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졸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고, 육군 장수 [[김응서]]와 합동했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 [[한산도 대첩]]에서 견내량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작살낸 이순신이 그 직후 새벽에 공격한 곳이다. 일방적인 우위를 끼고 전투해 승리했으나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조선 수군도 상당한 피해를 안았다.]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자주 비난하는 발언을 했는데, 정작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 당시 원균 본인이 쓴 장계가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섬을 일단 정벌하면 해군도 따라 나서겠다는 내용. 원균 병크의 대표주자이자 원균 맹장론 최대의 반론이다. "원균 10만 해병대 양병론"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병원균|병'원균']]-- --누가 봐도 선조 양아들이라고밖에 안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