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삼도 수군 통제사 ===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았다. [[징비록]]에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자마자 '''[[기수열외]]'''를 자초하는 장면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8110711267617005|#]]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군대 가본 사람은 다 알것이다.]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br][br]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 >[[징비록]](2007년, 이재호, 역사의아침, 291p) 이순신이 계급을 막론하고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이 작자는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놀이터]]로 만들면서 아예 언로를 막아, 휘하 장수들이 그냥 원균은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상황을 상의하고 수습하고 있다는 뜻이다. 참고로 징비록에서는 '''이 묘사 바로 직후에 [[칠천량 해전]]의 기록적인 패배에 대한 기사가 나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또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를 보면,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은 처가 원균과 [[친척]]이 되는 [[원주 원씨]]여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전라도 보성의 안중홍의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때의 만남을 기록한 것이 있다.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 안중홍(安重洪)으로 동암처사라 불렸다.]의 처[*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천상(元天祥)이다. 153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언보(元彦輔), 할아버지는 원익(元翊), 증조부는 원치(元菑)이며 외조부는 파평윤씨 윤현손(尹賢孫)이다.]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br][br]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환도|칼]]과 정[* 梃, 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해서야 될 말인가?"[* 대장이 무기를 휘두를 정도의 상황이라면 이미 전쟁은 결단난 상황이라는 의미이다.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도 그의 소설인 [[은하영웅전설]]에서 [[자유행성동맹]]의 사령관인 [[양웬리]]의 입을 빌려 "'''총사령관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직접 무기를 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이미 전쟁은 패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기사(記事)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조선 수군 전체를 총지휘하는 통제사라는 자가 어떻게 싸워서 공을 세우겠느냐는 질문에 겨우 "활 쏘고 칼 휘두르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만 봐도 장거리 항해, 항해 속력 등을 싸그리 희생하고 내구성과 포격에 집중한 연안 방어용 순수 포함이었고, 그에 대항하는 일본 군함은 내구성과 화포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빠른 기동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유도하는 배였다. 일본군의 특기는 백병전이었고, 이를 아는 조선 수군은 도선 접전을 피하려고 했으며 만약 도선하더라도 화살이나 총통으로 적군의 위세를 꺾어놓은 다음에 하였다. 임진왜란 중 수군이 육군보다 승률이 좋았던 것은 이순신의 절묘한 지휘 능력도 물론 한 몫 하지만, 백병전을 허용하지 않고 함선 자체의 피지컬 차이로 승리할 수 있는 덕이기도 했고, 배 안에 몇백명이 타고 있던 침몰시키면 전멸이라는 해상전의 특성을 백분 활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공을 세울거냐는 물음에 활과 칼, 즉 백병전을 언급한다는 건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특징, 장점, 단점이 뭔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 그렇기에 원균은 임진왜란 최초로 도선을 허용하여 판옥선을 빼았긴 장수라는 역사에 남을 불명예를 얻었고, 칠천량 해전으로 임진왜란 최초로 근연안 방어용 함선을 이끌고 외해를 나가 처참히 패배한 장수가 되었다.] 이러니 인척인 안중홍도 원균을 조괄이나 기겁만도 못하다 말한 것이다. 조괄은 지상담병[* 종이 위에서 논하는 병법.]이나 조괄병법이라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고사성어까지 있을 정도로 입 전략에만 능하고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저 책상에서 공부한 대로만 병법을 적용하다 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겁 또한 교만과 방심으로 전임인 [[악의(전국시대)|악의]]가 다 이겨놓은 전투를 말아먹은 인물로 언급된다. 하지만 조괄과 기겁은 자만했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아군을 모함으로 제거하려들지는 않았고, 주색잡기로 일을 게을리하지도 않았으며, 최소한 상대한 적장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명장들인 [[백기]]와 [[전단]]이다. 따라서 조괄과 기겁에 비유함은 오히려 원균에게 과분하다 할 것이며, 그의 행적으로만 평가할 때 중국사에서 가장 비슷한 인물은 아마도 [[진회]]일 것이다. * 은봉전서에 기록된 또다른 원균에 대한 평은 이렇다.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십시일반|한 숟갈 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며 비웃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원균의 친척이고, 원균의 당파인 서인에 속해서''' 그나마 좋게 써 줬을 텐데도 이 모양이다. 더구나 [[안방준]]은 [[장인어른|장인]]이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정승복]]이다. 그런 사람에게 인척이란 작자가 이런 망언을 하니 더더욱 갑갑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아래는 칠천량 해전을 전후로 한 원균의 작전 결과이다. * 원균이 통제사가 된 직후 [[거제도]]에서 벌목하던 왜병 30여명을 잡은 공이 있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그 유명한 조선 수군이라 별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로 인해 선조는 통제사가 되자마자 공을 세웠다며 추켜 세워줬고,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원균이 그들한테 술을 먹여 달래서 돌려보낸 척 뒤에서 기습한 전투였다. 기습당한 왜병들은 죽기살기로 싸워 고성 현령 조응도의 판옥선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평산 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 군수 안홍국이 죽었다. 나포된 고성 현령의 판옥선은 조선수군이 포위해 격파했는데 이게 밝혀진 후 조정의 반응은 그저 '''망연자실'''이다.[* 원균 옹호론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소위 '기문포 해전'인데, 사실 진상을 알고 나면 해전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다.]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말하자면, 이는 옥포해전 이후 일본군의 공격 때문에 판옥선이 [[점령]]당한 '''최초의 사건'''이다. [[정조(조선)|정조]] 때 편찬한 <충무공전서>에 안홍국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러자 후손들은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라면서 잘못된 기록으로 공이 묻혔으니 정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 때는 그나마 싸우다가 죽은 거라도 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었다는 건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라 후손 입장에서는 조상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 칠천량 해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단면이다. * 부산포 앞바다에서 시위하던 중에 일본 본토에서 오는 수송 선단과 마주쳤는데 이때 선전관 김식은 그들이 조선 수군을 유인하며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원균은 이를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무려 배 '''12척'''이 해류에 떠내려 가버린다. 격군들이 해류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추격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물마루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 수군 전체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미친 듯이 추격했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유인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쫓아가는 것은 '''바보짓'''인 데다가, 나중에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그냥 '''조선 수군을 보자 겁이 나 피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 즉, 그냥 도망가는 적들을 공을 세운답시고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지금의 항공모함과 같이 운용비나 생산비도 비싼 판옥선[* 판옥선을 만드는 데에는 산에 있는 [[소나무]]를 모두 베어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싼 [[배(교통수단)|배]]이다.] 12척을 날려버렸다는 얘기이다.[* 이후 [[명량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이라고는 겨우 판옥선 12척 뿐이었으나, 이 배로 이순신은 기적같은 승리를 일군다.] * 이후 원균은 [[가덕도]]에서 경야하는데, 이번에도 물을 확보하러 간 병사들이 기습을 당한다. 이때 원균의 병력은 최소 130척이지만, 400명이나 되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 버려진 400명은 왜군들의 손에 참혹하게 죽었다. 이순신이 겨우 62척으로 공성전을 벌인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사건이다. 물론 당시 일본군은 크게 증원된 상태였고, 조선 수군을 어떻게든 격멸해야 했기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맞서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보면 원균의 엉터리 지휘에 크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판옥선을 운용하려면 꽤 많은 인원 수가 필요한데다가 자신의 부하들이니 이순신이었다면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니, 애초에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 수색병력 투입과 경계 등의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들은 전란이 끝나면 국토 회복과 경제에 중요한 국가의 재산과 다름없는 장정이다. 근데 이들을 버렸다는 것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