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칠천량 해전]] ===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시작되었다.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선봉에 섰던 김완은 이 상황을 저서 《해소실기》에 자세히 남겼다. 당시 [[사관(역사)|사관]]의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는''' 임진왜란 최초이자 최대의 해상전 참패가 시작된 것이다. 칠천도 앞바다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에게 일본군은 야습을[* 여기에서 원균의 첫번째 졸장 면모가 드러나는데, 적의 본진을 공격하러 간 입장에서 야간에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이 점령한 땅에서 숙박을 하게 되면, 경계를 강화하는 게 정상이다. 이순신이 단 한 차례도 적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던 점과 대비되는 부분인 것이다.] 시작했고, 김완은 이에 맞서 싸운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휘하 병력의 절반 가량이 무작정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습한 적은 '''단 두 척'''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조선 수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고 하는데, 이때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金大福)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 정도 여유가 있었던 것. '''당연히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해,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훗날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김완이 《용사일록(龍蛇日錄)》[* 김완의 후손들이 김완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어 있음.]에서 이 상황을 회고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김완|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원균|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김완|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조선)|최호]]가 [[전사|간 곳]]을 모르고 [[김완|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 즉, 경계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으려고 오버하냐?"''' 하고 되려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 >[[김완]],『해소실기』 《용사일록》 [[http://xuecheng.egloos.com/4266330|출처]] 흔히 통념상으로는 이 야습 때 일본 수군의 주력 함대가 모조리 뛰쳐나오고, 이 기습으로 인해 조선 수군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그대로 궤멸하고, 배설이 이끄는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는게 칠천량 해전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당시 야습한 일본 수군은 토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이 도주했다고 확실해진 이후에야 우리가 잘 아는 '바다를 뒤덮은 적선 천 척'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고, 말 그대로 궤멸되었으며, 원균은 행방불명되었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 이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일 것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 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 >---- >《해소실기》 1권 어느 정도냐 하면, 조선 수군 160여 척 중 배설이 진작에 끌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전부 '증발'했다. 이는 칠천량 해전 최고의 의문으로,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든 아니든 조선 수군은 견내량으로 후퇴해서 한산도로 이동함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고성군(경상남도)|고성]] 춘원포[* 지금의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및 안정리 지역]로 후퇴해서, 거기서 배를 버리고 모두 도주해 버린다. [[배설(조선)|배설]]만이 홀로 후퇴하여 경상 우수군만 살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춘원포로 간 이유는 [[지휘관]]의 명령이었다는 말이 된다'''. 즉, 임진왜란 초기처럼 조선 수군은 원균의 명령으로 [[자살]]한 셈이 된다. 이 외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명량 해전]] 직후 수군의 재건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점을 들어, 침몰한 게 아니라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채 뿔뿔이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 직후만 해도 조정에서는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는 서술에서 '단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는 서술까지 나오면서, 이 해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사가 확인된 장수는 (뒤에 밝혀진) [[이억기]]와 [[최호(조선)|최호]] 둘이었고, (사실 처음엔 유일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포로가 된 [[김완]] 이외에는[* 김완은 나중에 탈출해서 조선으로 돌아온다.] 전사가 확인된 장수가 없으며, 명량 대첩 이후에 하나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뒤에도 나오지만, 전사를 확인할 수 없는 목록에는 '''원균도 있다'''. 명량 대첩에서 배가 없는 장수들은 통제사 좌선에서 일개 사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배를 타고 도망친 장수는 그대로 배에 타고 참전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여기에 전라 수영 휘하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배들이 견내량으로 후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와, 명량 대첩 이후 임치 첨사 홍견 등 판옥선을 끌고 합류한 장수, 조선 수군의 부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제법 많은 배가 춘원포로 가지 않고 견내량으로 탈출했다고 볼 수 있다.[* 원균이 사실상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을 볼때 원균의 명령에 불복하고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었을 때 받아왔던 지휘를 생각하여 독자적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쪽 설을 택해도 원균이 완벽하게 지휘에 실패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원균이 술에 취해 [[기생]]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습 당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정말 원균을 좋게 봐준 거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본 것이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조선)|최호]]가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은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설사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원균 단독으로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어야 했다. '''원균은 그야말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차라리 원균이 술에 취해서 지휘권이 무너졌거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너희들이 알아서 도망가라'라고 손을 놓아버렸다면 더 많은 배들이 한산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원균이 지휘권을 놔버렸다고 하면 그 휘하의 장수들은 임시방편으로 자신들끼리 세력을 유지하며 퇴각했을것이다. 이순신과의 경험은 헛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춘원포에서 대다수가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 내내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가 점령된 것은 해전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균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면 오히려 [[정상 참작]]이 된다. 이게 아니라면 원균은 '''제정신으로 자기 혼자서 도망치기 위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가놓고 탈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나마, '''그나마''' 그를 옹호해줄 유일한 방법이 견내량 바로 서쪽에 막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견내량으로 착각해서 갔다가 육지에 막히자 패닉에 빠져 도주했다는 것.[* 비슷한 상황으로 이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패퇴 도중 관음포를 해협으로 착각해 빨려들어가 도주로가 막혔다.]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휘가 무능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칠천량 해전이 사실상 [[정유재란]]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이미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음으로써 전선이 크게 확대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상 정유재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이 전투에서 그를 옹호해줄 방법은 없다.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김경진의 [[임진왜란(김경진)|임진왜란]] 1권 ~ 3권 참조. 능력이 없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도 전시에 공을 탐하면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 '''무능한 병사는 혼자 죽지만 무능한 지휘관은 패배, 나아가 국가를 절단내는 법'''이다. 원균이 정말 괘씸한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바로 '''배를 버린 것'''이다. 끝까지 어떻게든 싸우다 패했으면[* 예를 들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긴 했으나 그곳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에 받는 비판이 덜하다.]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되는데, 원균은 적이 몰려왔다고 사실상 지혼자 배를 내팽개치고 육지로 도주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조정과 권율이 출전을 거부한 원균에게 출전을 강압했기에 원균만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 자신이 부산포 진격 떡밥을 흘리며 이순신의 경질과 자신의 부임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자업자득이다. 장비와 훈련도는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며 아군인 무적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인 왜군의 사기는 장졸을 막론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정도에 조선 수군은 그동안 배 한 척 부서지지 않고 일본군을 쥐잡듯 했으니 나름 충무공과 비슷한 급의 수군 장수로서 '함께' 왜군을 격멸한 원균이 패배하리라고, 그것도 적군은 아무 타격이 없고 아군은 수습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무리 낙천적인 일본군이든, 아무리 염세적인 조선군이든 일본군의 승리 자체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하다못해 백전 노장의 옛 이순신 휘하 장수들 의견만 현명하게 수렴했었다면 이런 참담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원균이 그토록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이순신처럼 잘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재주와 모함에도 뛰어났으며 휘하 장수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1마리의 토끼가 이끄는 사자 100마리보다 사자 1마리가 이끄는 토끼 100마리가 훨씬 강하다'''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2018년 6월 3일에 방송한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는 당시 판옥선이 파도가 높은 곳에서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갑작스런 기습을 당해 운항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원균도 정작 통제사 임명전과 달리 판옥선을 가지고는 전라도와 달리 외해로서 파도가 높은 부산 방면에서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 출전을 주저하다 (선조를 통한) 권율의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출전 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했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 원균을 실드치겠다고 한 발언으로 추정되는데 이건 오히려 원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발언이다. 임진년부터 명량해전까지 해전은 모두 [[경상도]] 바다에서 벌어졌고, 그 자리엔 원균도 함께 있었다. [[부산포 해전]]에서도 원균은 이순신을 따라서 같이 출전했고 위에 언급한대로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였다. 저 논리라면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이래 경상도 바다의 특성에 대해 무지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반면 이순신은 1597년 1월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부산까지 나갔다가 신나게 왜군을 두들기고 돌아온다. 백번 원균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순신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해냈다. 이처럼 방송에서는 마치 원균이 마치 부당한 명령에 억울하게 희생된 [[군인]]처럼 묘사하였으나, '''애당초 먼 바다까지 출정해 전투해야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한 사람이 원균이다.''' 원균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따라 출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괜히 트집을 잡아 그를 모함하고 헐뜯어서 마침내 통제사의 자리를 빼앗았으나, 정작 자신도 해당 작전을 따르려 하지 않다가 곤장을 쳐맞고 난 후에야 질질 짜며 억지로 출정했다가 조선 수군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 문제는 원균을 옹호하는데 들기에는 적절한 예시가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원균이 철저하게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도 없는 심히 부적격한 인물이었음을 재확인시켜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비합리적인 작전을 주장하며 군지휘권을 얻고, 결국 그 작전을 시행하다 참패한 전략적 무능은 물론 지형을 읽는 능력도, 정찰을 게을리 않는 꼼꼼함도,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까지 죄다 낙제 수준이었던 전술적 무능, 뛰어난 동료를 모함하고 뇌물과 아첨과 인맥으로 출세를 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격적 결함을 남김없이 보여준 사람은 바로 원균 본인이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이 부분을 통째로 건너뛰어 원균을 마치 희생양처럼 묘사한 것은 [[역사 왜곡]]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방송 시작 전에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패널들이 되도 않는 뉘앙스를 깔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