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일지 === * 1597년 ([[선조(조선)|선조]] 30년) 원균이 [[세는나이]]로 58세인 해. * 2월: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됨. * [[3월 9일]]: 거제도에서 일본군의 수급 47개를 취함.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래 '''최초로 판옥선을 탈취당함.'''[* 하지만 실상은 휴전 기간에 일본군의 뒷통수를 친 거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배 3척과 병사 47명을 잃었지만, 반대로 조선 수군은 판옥선 1척, 고성 현령 조응도, 병사 140명을 [[피로스의 승리|잃었다]]. 자세한 내용은 [[칠천량 해전]] 문서 참조.] * [[6월 18일]]: 100여 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동. * [[6월 19일]]: 안골포에서 일본 군함 2척을 포획, 가덕도에서도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함. 전투 이후 회항하던 도중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역습을 받음. 평산만호 김축이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군수 안홍국은 머리에 탄환을 맞고 전사함. '''또 판옥선 1척 탈취당함.''' * [[7월 4일]] ~ [[7월 5일]]: 출전한 것으로 추정.[*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 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 * [[7월 8일]]: 소규모 전투에서 일본 수군 10여 척을 격파. 이후 일본 수송 함대와 조우했고, 도주하는 적 수송 함대를 추격함. 그러나 무리한 추격으로 격군[* 노를 젓는 병사들.]이 지쳐 '''해류에 12척이 떠내려가 5척은 두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함'''.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 수군은 전멸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16일자 기록.] * [[7월 9일]]: 서생포에서 왜군과 교전한 끝에 판옥선 20여 척이 손실됨. * [[7월 14일]]: 조선 수군 함대 전체가 출동 부산 앞바다 물마루[* 現 [[부산광역시|부산시]] [[북구(부산)|북구]] 화명동 수정 마을.]을 지나가 가덕도에 정박. '''이때 물을 구하러간 조선 수군 4백 명이 다카하시 나오쓰구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에 의해 전사함.'''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했으나 또다시 기습 당해 육지에서 돌아감. * [[7월 15일]]: 비바람이 몰아쳐 기상을 살펴보다 오후에 풍랑을 무릅쓰고 영등포에서 칠천량[*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에는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어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으로 이동함. 밤 10시에 일본 수군에게 습격받아 전선 4척이 불에 탔음. * [[7월 16일]]: 새벽 4시,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칠천량 해전|일본 수군이 포위를 완료하고 공격을 시작함]]. 조선 수군 거북선 3척 모두 침몰, 판옥선 중 130여척이 침몰당하거나 실종됨. 수군 수천여 명 전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