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난중일기]] === 보통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대중매체 등지에서는 이순신이 [[대인배|원균의 무능함과 흉폭함도 넓은 아량으로 다 감싸 안아주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으나, 이순신도 불세출의 영웅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실제 이순신은 원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부하들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깐깐한 잣대를 세워 평가하였다.[* 이는 이순신 자기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기준이어서, [[난중일기]]에서도 자책하는 표현이 많다.] 그런데 원균은 무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성도 되어먹지 않아서 [[찌질이|매우 옹졸하고 자신을 극도로 시기]]했고, 무엇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저질렀으니 이순신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이순신이 저술한 [[난중일기]] 곳곳에서 원균에게 크게 분노하고 비난하는 대목이 많다. 원균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실책을 보면서도 일단은 '원 수사', '경상수사', 또는 원균의 호를 따서 '원평중'이라고 점잖게 써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균을 가리키는 호칭이 점점 험악해진다. 1597년[* 이 해 3~4월 원균의 모함에 의해 이순신은 서울로 압송되어 죄인 취급되었다가 [[백의종군]]을 전제로 겨우 석방되었고, 4월 13일 모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했다. 당시 유교 가치관에 따르면 전시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무시당하는 매우 굴욕적이고도 원통한 취급을 받았다.]부터는 그냥 '원'[*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칭할 때 아무것도 없이 성씨만 딸랑 써 놓는 것은 이름조차 부르기 싫다는 뜻으로, 기실 흉악 [[범죄자]]에게나 쓰는 극히 경멸적인 표현이다. 현재에도 각종 사건 경위서나 보고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정말로 성씨만 달랑 적어 놓고 [[볼트모트]] 취급을 한다.]으로 적다가 5월에는 대놓고 흉측한 자, '''[[원흉]](元凶)'''이라고 표현하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가는 일기 형식의 기록물인 난중일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올곧고 깐깐한 성향에 따라 쓰여진 것이라 원균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역사적으로도 사실로 검증된 일들만을 다루기에 실록 못지않은 훌륭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차검증|아래 실록과도 비교해 봤을 때 일치하는 사실]]'''이 매우 많으니,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이순신은 원균이 각종 패악질을 일삼는 꼴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지만, [[선비|대놓고 욕설을 적는 게 껄끄러워서인지]][* 정말 [[극대노|화나는 상황]]이면 이걸 '[[답이 없다|표현할 길이 없다]].'라는 식으로 [[군자|화를 참으며]] 에둘러 작성하였다. 심지어 [[칠천량 해전|엄청난 일]]을 터트리고 원균이 죽은(것으로 추정되는) 이후에는 지금까지 건조한 배들과 그동안 생사를 함께한 장병들이 어육이 된 것을 [[영구까임권|두고두고 욕할 법]]도 한데, 이미 [[고인드립|죽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그래도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아니면 그냥 이름조차 입에 담기도 싫은지는 몰라도 패전 사실에 오열한 다음에는 원균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난중일기는 실록보다 원균을 더 점잖게 표현하였다.[* 본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갈 수 있는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목격담이나 원균의 직속 부하 등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공문 등의 증거물들을 바탕으로 올바른 비판이나 [[팩트폭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이순신만큼 원균을 잘 아는 이도 드물다. 전란이 터진 임진년부터 원균이 사라지는 정유년까지, 좋든 싫든 원균과 동고동락한 사람이 이순신이기 때문이다.] 실록은 원균이 올린 말 그대로 원흉들과 방관적 공범자들의 책임 회피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또 이하의 번역본은 원문에 해석이 덧붙여져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고 참고하길 바란다. * 1592년 5월 2일. 삼도 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쳤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5월 3일. 방답[* 방답(防踏)은 인명이 아니라 지역명이며, 방답 첨사 [[이순신(무의공)|이순신]](李純信, 충무공과는 [[동명이인]])을 말한다. 정3품인 우수사가 아니라 한계급 아래인 종3품의 첨사가 병력을 보냈으니 현대로 치면 사단 병력이 오는 줄 알았는데 연대 병력이 온 셈. 이 우수사는 이억기 전라 우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가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 1593년 2월 8일. 아침에 '''[[원균|영남 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이억기|전라 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 난중일기에서는 같은해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같은해 2월 5일. 보성 군수의 소속 함대가 비 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 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 정도 더 수고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거다. 이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 이 날은 [[웅포 해전]]을 한 날이다.] (중략) 곧이어 [[진도군|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 때문에 경상 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 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 禿沙伊項, 현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 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 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민간인 학살|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 적군도 아니고 고기잡는 자국민을 잡아다 목을 베어 공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 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 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까지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 * 5월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만호 이어념이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하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 원균의 망령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하다'''.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이억기|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 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 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기생|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 6월 10일. (전략) 축시(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 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때문에 작전 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 분석 → 작전 입안 → 출동준비 → 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거없이 그냥 가자고 한거다. ]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 6월 10일 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 계획안과 작전 회의 요청서를 보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출정하자고 공문을 보냈던 본인은 전날 마신 숙취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인사불성이었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하고있어야 했다.] * 7월 21일. 경상 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 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 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 족장(발바닥을 때림) 10대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이억기|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이억기|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 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척,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이 부분은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7척,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으로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 * 1594년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 1595년 2월 27일.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조선)|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 1597년 4월 27일. 일찍 떠나 송치[* 松峙: [[순천시]] [[서면(순천)|서면]].]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부사[* 우치적: 순천 부사.]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鄭思俊)도 와서 '''원공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 [[백의종군]] 하던 당시.]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원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여수 본영'에서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했다. 여수는 전라 좌수사 겸 3도 수군 통제사의 본영이고, 한산도는 둔치고 있는 진이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짓을 했으면 여수 본영 사람들이 백의종군을 하느라 아직 제대로 된 보직을 부여받지 않은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릴까...? 이건 원균이 부임한지 이제 겨우 석달 지났는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가능하다.]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6일. (전략) 정원명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측한 자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부찰사가 여수로 나와서 병으로 조리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 군수 안괄(安适)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 5월 8일. (전략)[*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凶)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무장이라는 인간이 평범한 여성을 일대일로 제압하는데 실패했다는 어이없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 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 (중략) '''원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광양 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이원익|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令公)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 申蓁. 신진.]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원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 6월 19일. 새벽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진에 이르니 원수와 황 종사관이 나와 앉아 있었다. 원수가 내게 원균의 일을 말하기를 "통제사의 일은 그 흉측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안골포와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심보인가. 질질 끌면서 나가지 않으려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천으로 가서 독촉하겠다"는 것이었다. (후략)[* 원균의 주장이 정당한 것이 맞기는 하다. 하지만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부산포 공략 떡밥을 뿌린건 원균 자신이었으니 동정할 필요가 없다. 자업자득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 우병마사의 병영 뿐인데, 고작 수천 명 뿐이며, 그나마도 낙동강 하구부터 초계까지 수비 작전 중이었다. 이 병력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몰아낸다는게 말이 되는가?] * 6월 17일.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그 주장[* 主將, 원균을 뜻한다.]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권율|원수]]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 맨날 되도않는 모함만 하던 원균으로부터 상석에 앉아 대접받는 꿈을 꿔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현실에선 사고치고 총대장한테 붙잡혀 갔다는 얘기. 원균은 이때 출전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이유로 도원수 [[권율]]에게 호출당하여 곤장을 맞는 치욕을 겪었다.] * 7월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칠천량 해전|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조선)|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