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실록 ===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606026_002|원균의 등급에 대해 의논하다. 선조 163권, 36년(1603년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6월 26일(신해) 2번째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4019_005|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선조 87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4월 19일(기묘) 5번째 기사.]][*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7022_002|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조 90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2일(신해) 2번째 기사]]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7022_003|원균이 지휘한 수군의 패배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선조 90권, 30년(1597년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22일(신해) 3번째 기사]] *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기사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윤근수가 상소를 올린 회의에서 선조가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류성룡은 "원균은 용감히 싸우는 것은 장점이나 지친 군졸을 위로하는 법을 모릅니다. 이런 일을 할 줄 아는 다른 사람이 있다면 (원균을 제하고 그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고 정탁은 "수전이 그의 장기이니 이제 그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원균이 힘껏 싸운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나 영남의 수군 중에는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으니 원균에게 맡길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이원익이 "올라온 뒤에 들으니 원균이 이순신에게 분한 말을 매우 많이 하였다 합니다. 이순신은 결코 한산도에서 옮길 수 없으니 옮기면 일마다 틀어질 것입니다"라고 전하자 선조는 "원군을 청해 수전한 것은 원균에게 공이 많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라 하며 이의 공이 원균보다 나으나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고 하였다. 이원익이 "원균은 당초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았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서 일어납니다."라고 했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포악하기 까지 합니다. >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는 자가 많고 앓다가 죽는 이도 또한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충청도)에 가득합니다. >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기용치 마시옵소서. >---- >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