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원릉군기념관 ==== [[파일:원릉군_기념관_개관식_2018.jpg]] 위의 사진은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해 있는 원균의 가묘다. 이름은 원릉군(原陵君)기념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t_story&logNo=221254870193&categoryNo=0&parentCategoryNo=17&viewDate=¤tPage=1&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List|평택시 공식 블로그]]. 평택시의 원균 밀어주기는 계속되었고 2018년 4월에는 '원릉군기념관'[* 건물명에 붙은 원릉군은 원균이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받은 작호에서 따온 것으로 평택시와 원주 원씨 종친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건설되었다. 건설비는 시비와 도비가 각각 2억 5천만원,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1억 7천만원을 지원해 총 6억 7천만원이 투입되었다. 운영비는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부담하며 평택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 배치 비용을 지원한다고 한다.]을 개관했는데 당연히 지역구 의원이자 원주 원씨 대종회 회장인 원유철도 참여했다. 건립 목적은 2018년 4월 16일 개막식 때 축사를 한 원유철의 발언으로 알 수가 있는데 기념식에서 원유철은 “'''원릉군 원균 장군의 많은 업적은 감춰지고 마지막 패전만 부각된 지금까지의 인물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기념관 내부의 소개글들도 대부분 기존 통설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설명되어 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 [[칠천량 해전]]의 책임을 원균에게 출전을 강요한 조선 조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 출전을 강요당하다. 칠천량 해전}}} >---- >▣왜의 수군군세 >왜는 강화 회담을 하는 3년여의 기간 동안 수군의 전력을 철저히 증강 시켰다. >수많은 대선이 건조되었고, 패전의 경험을 살려 우리 수군에 대한 전략도 준비된 상태였다. 또한 순천에서 부산포까지 중요한 포구는 모조리 왜의 육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의 전략 >조정의 목표는 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적을 미리 격파하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을 받은 [[권율]] 도원수와 체찰사 [[이원익]]은 부산 앞바다의 왜의 수군 본진을 치도록 명령한다. >▣원균의 전략 >그러나 원균의 전략은 달랐다.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안죽도, 가덕도 등 육지에 숨어있는 적을 그대로 두고 부산 앞바다로 나가는 것은 퇴로가 차단되어 만약에 대비할 수 없어 병가의 승산이 아니니 먼저 육지의 왜병을 쫒아내 주어야 한다."는 수륙병진을 주장했다. >조정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중간첩 요시라가 조선 수군이 기습하면 승리 할 것이라고 귀뜸하므로 줄곳 출전을 강요하였다. >급기야 도원수 권율은 머뭇거려 실기했다며 통제사 원균을 곤장으로 윽박지르므로 일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부산 앞바다에 나아갔다. *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적이 없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 □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지 않았다.}}} >---- >▶ 조정이 이순신에게 물은 죄목은 >1. 일본의 이중 간첩 요시라가 경상병사에게 제공한 가토가 조선에 올때 공격하라는 정보를 조정이 이순신에게 명령하였으나 이를 묵살한 일, >2. 당시 오랜기간 전투를 하지 않고 대치만 하고 있는 이순신을 독려하기 위해 통영으로 내려간 세자([[광해군]])의 수차례 걸친 호출에도 임하지 않은 일, >3. 왜영방화 사건으로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현이 한 일을 스스로가 한 것처럼 장계하여 조정을 속인 일,[* 왜영 방화사건은 안위, 김난서가 왜영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이순신이 이를 보고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 기사) 그러나 이후 김신국이라는 인물이 "이순신이 한게 아니라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연이 한 일인데요?"라는 장계를 올렸고(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기사) 이 사건으로 이순신이 왕을 기망했다며 조정이 뒤집어 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신국이라는 인물의 거짓 장계일 확률이 높은데 [[http://egloos.zum.com/history21/v/2342875|관련 내용을 참고]]. 그리고 1월 27일에 선조가 "그거 이순신이 올린 장계가 맞어."라며 인정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4. 원균과 함께 치른 옥포 해전에서 공적에 대한 단동 장계로 남의 공을 빼앗은 일 등이다. >---- >이 네가지의 잘못은 모두 조정과 통제사(이순신) 간에 명령 또는 장계로 확인된 명확하고 공개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모함 운운함은 결코 타당한 논리라 할 수 없다.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은 있었으나 모함한 일은 없었다. * 임진왜란 발발 당시 원균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 원균의 임란 초기 대응}}} >---- >원균이 경상우수영에 도임한지 두 달 후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정은 왜가 명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에 대한 조선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며, 1만 명 규모의 왜침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왜병의 수는 15만의 대군이었다. >약 100여 년간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를 거친 왜군은 생각보다 강했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18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100여년간 태평성대였던 조선은 숭문천무[* 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의 전통으로 문약의 극치였고, 방위체제도 병농일치제, 진관체제 등 취약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군의 침공을 받은 경상 좌수영 관할은 거의 무인 지경이었다. 경상좌수사는 도망쳤으며 관내 모든 관포는 텅 빈 상태였다. > >{{{+1 □ 부임한 지 불과 2개월의 경상 우수사 원균은}}} >▶ 우선 적침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알려 전투준비를 하게 하는 한편 >▶ 관내 각관포의 지휘관을 수영으로 집결시켜 본진을 지키도록 하고 >▶ 비장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보내 함께 적을 막자고 원병을 청하였다. >▶ 또한 자신은 급히 흩어진 수군을 모아 함대를 편성하고 적과 싸워 곤양 가덕도 등지에서 적선 10여 척을 불살랐다. >▶ 그 후 연합수군이 편성되어 [[옥포해전]]을 치르기 전 24일간 고군분투하며 왜의 서진을 막았다. >이순신은 수차례의 출전 요청에도 맡은바 경계가 있음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원균의 수하 [[이운룡]]이 간절히 청하고 이순신의 수하인 정운, 이순신등이 강력히 출정을 요구하고, >조정이 출정을 명하므로 출전요청 20일 후인 5월 6일 옥포 앞 바다에 도착하였다. * 원균은 암담 그 자체인 경상도 해상 방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반면, 이순신은 경계를 핑계로 뭉그적 댔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명백한 역사왜곡이기에, 국민 세금이 잘못 된 곳에 사용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2101744723924|##]], [[http://www.newsto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528|##]], [[http://www.ptlnews.kr/bbs/board.php?bo_table=news01&wr_id=104307|##]] 한 [[네티즌]]이 [[평택시]]에 직접 문의하기도 했지만, 평택시는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원균의 숭고한 호국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2920776|관련 글]]. [각주] [[분류:원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