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균 (문단 편집) ==== 70여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 ==== 원균이 장수로써 제대로 된 전략전술이나 식견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맞지만,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 70여척을 전부 자침시킨 순간부터 비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전란 시작 원균의 행보부터 비판하는 것은 전근대 조선수군과 현대 한국해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다. 현대 해군이야 모항에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승조원들이 언제든지 출동지시에 응할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키워진 전근대 조선수군은 소규모로 쪼개어 관할 진포에 흩어져 있었다. 20만의 왜군이 느닷없이 한꺼번에 상륙해서 밀어닥치는 시나리오는 조선군이 흔히 생각했던 왜구의 침략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경상우수영이 수영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곤 하나 그만큼 관할 구역도 넓어 임진왜란 직전에 8관 16포였다. 70여척의 전선들은 8관 16포에 흩어져 있었지 경상우수영에 모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배를 움직일 인원들도 항시 배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수군은 상하번으로 나뉘어 근무했고 전시에는 지방관들에게 통보해 병력을 소집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고니시]]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관할에 상륙했지만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우수영 관할로 상륙해 밀고 들어왔고 전쟁 이틀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경상도 전역이 전쟁공황과 행정마비 사태가 몰아닥쳤다. 경상우수영의 3분의 1규모로 수영 중에 규모가 세번째에 불과했고 전화를 입지 않았던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병력과 전선을 모두 소집하는데 보름이 걸렸다. 전라좌수영의 2배, 경상우수영의 3분의 2 정도 규모인 [[이억기]]의 [[전라우수영]]은 해당 기간안에 병력과 전선을 모으는데 실패해서 이순신의 1차 출동에 함께하지 못했다. 전화도,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없던 시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예비군 소집문자 보내면 택시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전라좌수영이 소집에 보름이 걸렸고[* 그러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수군에게 본영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건 4월 27일이며 본영에 수군 집결이 완료된건 5월 1일로 5일 정도 걸렸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다만 이때 29일까지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난중일기에 따르면, 본영으로 집결이 완료된 시기는 5월 1일로 원래 계획보다 2일이 더 걸렸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우수영도 전 전선을 모으려 했다면 최소 5일 이상은 걸렸으리라 추정해볼 수는 있다.], 전라우수영이 그보다 오래 걸렸다면, 제일 큰 경상우수영은 당연히 20일 이상 소모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다는 가정하에. 즉, '''원균은 경상우수영 전력을 동원할 시간 자체가 없었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무리였다'''. 실제 개인적으로 원균을 극혐 수준으로 싫어했던 이순신조차도 난중일기에 이때 원균의 행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단순히 경상우수영이 와해되었다고 원균을 비판하는 주장은 전근대 시대상과 소규모 국경방어 병력이 시간을 끄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내려보내는 조선의 방어전략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비판이 [[원균옹호론]]자들에게 파고들 틈을 준다. 경상우수영 전력은 원균이 70척을 불태운게 아니라 애초에 모일 틈도 없어서 각 진포에 흩어진채 와해되었다고 보는게 맞으며 원균이 군영을 불태운건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대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