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 (문단 편집) == 개요 == || {{{#!wiki style="margin:-5px -10px" [youtube(rwzixYxnQWM)]}}} || || 북원 시기까지 포함한 원나라의 역사. ||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이 [[중국 대륙]](중원)을 통치한 시기를 말하며, 수도는 칸발리크([[대도]])였다. 원나라는 존속기간이 97년으로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정도면 중원의 통일 왕조들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그 이유는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로마 제국]]이나 중화권 국가들과는 달리 [[소프트 파워]]가 부족했고, 지배계급 상당수가 [[문맹]]이었으며[* 원나라 황제들이 [[문맹]]이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쿠빌라이 칸]] 때까지만 그랬고, 그 이후부터는 원나라도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적어도 황제들은 모두 한문에 능했다. [[문종(원)|문종]] 같은 경우는 스스로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인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통치에는 한계가 있었다.[* 같은 이민족 통일 왕조인 [[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황제들이 한화되기 시작하면서 [[만주족]] 황제부터 만주족 관료들까지 전부 소프트파워가 생기게 되었고, 268년 동안 지속되었다. 단, 청나라 역시 말기까지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 금지, 한족의 [[만주]] 이주 금지, 한족의 고위직 진출 금지, 한족 여자의 황후 책봉 금지 등 어떤 면에서는 원나라보다 더한 면도 있었다.] 게다가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중세 흑사병]]'''까지 돌아서 결정타를 먹었다.[* 원나라보다 단명한 세 왕조는 존속기간이 고작 10~30여 년 수준으로 급이 다르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무주나 왕망의 신나라는 너무 단명해서 아예 왕조로 쳐주지도 않는다.] 또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흑사병에 의해 원나라의 인구가 급감한 것은 아니며, 이미 흑사병이 유행하기 전에 몽골군의 잔혹한 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 인구가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치를 일삼는 몽골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 이에 따른 하층민들의 궁핍, 사회 체제의 모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국가를 유지하는 데다가[*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 [[내몽골]]은 [[중국]], [[부랴티아]]는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이다.]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와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 물론 후대의 정복왕조인 청나라에 비해서는 한족들을 노예 취급하면서도 대단히 자유방임적이고 관대한 편이었다. 그들의 문화와 의식을 존중해주고, 한족들이 치르던 과거 시험 의례를 마치 [[양덕후|현대의 코스프레 의식]]으로 보듯 몽골족들은 즐겨보면서 좋아했다. 그만큼 타민족의 문화에도 관심이 많으면서 관대한 나라가 원나라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족에 대한 취급이 대중에 의해서 과장된 것이 있다.] [[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의 [[중국]]을 [[몽골]]의 [[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으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본인을 몽골 제국의 대칸이자 중화 황제라고 칭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쿠빌라이 칸이 추존한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거나 중화 [[황제]]인 것은 아니니, 현대 [[중국]]의 [[중국인]]이거나 중화 영웅이라는 주장의 설득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쿠빌라이 칸보다 더 일찍 칭기즈 칸을 자국의 군주로 추존한 나라도 없지 않다. 또한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도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라는 중국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사실 내몽골인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 아무리 내몽골인이 중국 내에서 {{{-2 (심지어 내몽골 자치구 안에서도)}}} 다수 민족이 아니라고 한들,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 인구가 민족 불문 외몽골 전체 인구보다 많다.''' 외몽골 단독으로 몽골 제국의 계승자가 되면 그 외몽골을 압도하는 내몽골 몽골족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된다. 게다가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 하지만 원나라 지배층이 한족화되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원나라 지배층은 계속 변발과 자신들의 관습 및 문화를 유지했다. 심지어 그들은 새로운 수도에 중국식 궁궐을 지었지만 이는 한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으며, 실제로 원나라 황제들과 지배층들은 여전히 게르에서 생활했다.[* 원나라 황제의 경우 궁성에 게르를 설치하고, 거기서 살았다.] 물론 원나라를 세운 후 몽골 지배층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는 한족화라기보다는 원래 물욕이 강했던 몽골인들의 습성이 정복을 통해 극대화되며 사치에 탐닉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유교, 도교 등 중국 고유의 사상과 문화를 접하기는 했지만 이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중국 정복 이후 접하게 된 티베트 라마교에 심취하는 등 중국 한족 문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해갔다. 애초에 유목민의 문화는 유교로 대표되는 정주민, 농경민의 문화와는 너무 달랐고 정반대라 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충, 효, 분수에 맞는 행동 등 유교의 질서는 그들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철저히 힘의 논리에 따라 행동하고, 막내 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말자 상속 전통이 있는 그들에게는 연장자를 우대하고 장남을 우대하며 명문에 따른 충성을 강요하는 유교는 이해하기 힘든 문화였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몽골 제국]]의 제5대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 >('''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 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북위]]를 세운 선비 탁발부도 한화 개혁을 추진할 때 황족의 성을 원씨로 선택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었고, '''서역의 4대 칸국[*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몽골 제국을 아우르는 대칸이었지, 실질적으로는 제2대 오고타이 칸의 붕어 이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어 사실상 독립되거나 분열되어 떨어져나갔고, 각자 멸망하는 시기도 다르다. 킵차크 칸국은 현대 러시아의 전신이 되는 모스크바 공국에게, 일 칸국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다가 국력을 소진하여 내부 분열로 멸망했고, [[티무르 제국]]에게 흡수되었으며, 차가타이 칸국은 이슬람 세력과 몽골족의 기득권 간의 대립으로 혼란이 발생한 와중에 티무르 제국에게 역시 흡수, 멸망당했다. 원나라도 명나라에 의해 북방으로 축출되었는데, [[북원]] 때문에 몽골 제국의 멸망을 청나라의 만주족 황제들이 대원전국옥새를 가져간 17세기로 보긴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실질적으로 멸망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원나라 우위의 몽골 제국 연대는 유지되었다. 각 칸국이 붕괴되기 전까지 지배층 간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원나라 황제의 통행증만 있으면 명목상 몽골 제국 영역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중세 몽골어로 '''예해 몽골 올로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었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이었다. 한족 왕조인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태풍]]과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했다. 잘 안 알려졌지만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졌다. 북원은 20여년간 명나라와 다투다가 겨우 3대[* 북원의 제1대는 원나라의 제11대 황제였던 혜종 [[토곤 테무르]]이므로, 원나라가 쭉 이어진 것이라 간주하면 제13대였다.]에 이르러 쿠빌라이 황통의 [[천원제]]가 대칸위를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했다. 이때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북원은 이 20여 년간 이어진 원나라의 직접적인 연장선만 일컫기도 하고, 혹은 훗날 [[청나라]]가 몽골의 대칸위를 차지할 때까지 250여 년간 몽골 초원에 존재했던 모든 후계 정권을 통틀어 일컫기도 한다.[* 권용철(2021), <원대 말기~北元의 重臣 카라장(哈剌章) 小考>, 《史叢》 104.] [[한족]]을 정복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 다만 의외로 [[원명교체기]]때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 사족들도 굉장히 많았다.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즉,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즉 향촌의 사족들이 사실상 동네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막북의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서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고,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다.][* 다만 그것보다는 의외로 몽골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든 사람들에겐 대우를 해줘서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받은 사람들은 의외로 충성했다. {{{#!folding 【《고려사》 <세가> 기사 】 >원(元)에서 양중신(楊仲信)을 파견하여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 귀부군(歸附軍)(몽골에 귀부한 남송군)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했다. 왕이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인 정랑(正郞), 김응문(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道)로 파견했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ㅡ}}} 몽골은 고작 병졸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족들 중에서 원나라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던 이유는 비록 원나라가 한족들이 오랑캐라고 혐오하던 몽골족이 세운 나라이기는 했지만, 한족들이 배운 유교 문화에 의하면 어쨌든 원나라는 중국을 통치했고, 원나라 황제는 중국의 군주였기 때문에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낸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 주원장과 서달조차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비록 오랑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황상이었던 사람이다. '''중원을 오랫동안 통치해왔다. 즉, 그는 합법적인 통치자였다. 어찌 체면을 살려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정말 그를 붙잡는다면, 어떻게 그를 처리해야할 것인가? 이 전임 황제에게 땅을 하나 떼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죽여버려야 하는가? 그를 풀어주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o/3062]]]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원 간섭기|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한민족 전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는데 라마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였고, 탄트라 좌도 밀교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였는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계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했고, 원나라가 사라지자 중국에서도 티베트 불교가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다 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되었다. 다만 몽골 초원에 본격적으로 티베트 불교가 전파된 것은 원나라의 붕괴 이후인 [[알탄 칸]] 시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