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원나라 (문단 편집) == 문화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중국 낙양 2.jpg|width=100%]]}}} || || {{{#000000 중국 최고의 천문대인 [[허난성]] [[정저우]] 덩펑시의 관성대 (登封观星台).[* 1276년에 지어진 석조 건축은 원나라 건축의 대명사 중 하나이다.] }}} || 근본적으로 '''몽골 지상주의'''였으나 [[청나라]]처럼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 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과 [[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다는 말이 있으나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 다만 훗날의 청나라는 강남의 한족들까지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고 안 하면 참수까지 시킬 정도로 의무화했고 이를 멸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어찌나 심하게 탄압했는지 [[태평천국 운동]] 때는 한족들이 변발을 자르기는 했으나 이미 [[상투]]가 실전되어 어떻게 묶을지를 몰라서(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산발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청나라 때에도 그나마 유학자들과 도사들은 상투를 트는 게 가능했다.]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했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나라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은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 정확히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복식이었으며 이것도 명나라 홍치제 시기에 그의 선포로 한족 복식이 전통적인 한푸로 바뀌게 된다(15세기 후반).]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과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소소하지만 휴지 문화 또한 원나라 때에 생겼다. 원나라 이전에는 일을 본 뒤 얇게 가공한 나무 조각으로 닦았다고 하며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 원은 훗날 쿠빌라이 칸에 의해 파스파 문자를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기록 문화가 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