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병오 (문단 편집) == [[박정희]]와의 인연 == 전술한대로, 월남 후에 3군단 포병단장인 [[박정희]] 대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 박정희는 원병오의 도움으로 1953년말에 서울특별시 고사배동(현 [[신설동]])에 위치했던 원병오의 사촌 누이 집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박정희 대령의 준장 진급 후 이듬해인 1954년 1월17일에 미국 [[오클라호마]]의 육군포병학교로 5개월 예정의 유학을 떠났을 때, [[육영수]] 여사가 쌀이 떨어져 생활이 곤란해진 적이 있었는데, 원병오가 당시 [[제20보병사단]] 부사단장이던 [[이주일(군인)|이주일]] 준장 및 [[제26보병사단]] 참모장이던 [[김재춘]] 대령을 찾아가 부탁하여 문제를 해결시켰다. 원병오는 이후 육군 대위로 예편했으나, 월남 직전 한달동안 [[조선인민군]]에 소속되었다는 "사상 전력" 때문에 연구소나 학교 근무 때마다 수많은 신원보증을 받아야 했고, [[미수교국]]에서 열리는 국제학회 참석을 위해서도 수없이 많은 보증서를 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에 그러한 고난은 끝이 났다. [[박정희]] 의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박정희 의장에게 인사를 갔을 때 "바라는 것 한 가지쯤은 꼭 들어주도록 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던 원병오는 그 말에 의지해 청와대를 찾아갔다. 당시 그는 한국자연보존연구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 교수가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며 지원을 요청하자 박 대통령은 "자연보호는 곧 나라사랑"이라고 화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2억원을 지원했다. 자연보호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한국자연보존협회는 이렇게 탄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