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성왕 (문단 편집) === 즉위 이전 === 태종 무열왕의 외현손[* 열조 원성왕은 무열왕의 4대손이다. 무열왕→김의관과 결혼한 문무왕의 여동생→김위문→김효양→열조 원성왕 순.]이며 아버지는 [[일길찬]]을 지낸 [[김효양]](金孝讓).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다. 부계로만 따지면《[[삼국사기]]》에는 제17대 내물 마립간의 12세손,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의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성왕의 부계 5대조는 김마질차(金摩叱次)[* 그냥 '마차'(摩次)라고도 한다.]라는 사람으로 세 번째 관등인 [[잡찬]]을 지냈다고 한다. 증조부 김의관과 조부 김위문이 두 번째 관등인 [[이찬]]을 역임한 고위 [[진골]] [[귀족]]이었다. 780년 [[선덕왕|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참고한 기록. 최근 들어서는 [[쿠데타]]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인물을 [[김경신]]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김양상을 선덕왕으로 옹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선덕왕 즉위 직후 [[상대등]]에 오르게 되었다. 선덕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태종 무열왕의 차남 [[김인문]]의 현손이었던 [[김주원(신라)|김주원]]이 태종 무열왕의 사위 김의관의 증손이었던 원성왕보다 왕위에 더 가까웠지만 [[경주시|경주]] 알천 북쪽에 살던 김주원이 [[홍수]]로 인해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귀족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운명]]으로 여긴 [[신하]]들이 김경신을 [[국왕]]으로 추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가 말했다.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09&categoryId=49615&cid=49615|##]] 이렇게 귀족 회의를 통해 원성왕을 임금으로 추대하자 곧 비는 그치고 [[나라]]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기록상의 [[계절]]은 정월 13일, 양력 2~3월인데 이 계절은 [[태풍]]도 없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시기라 홍수가 딱 그때 맞춰 일어나는 것도 무리고 홍수로 귀족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위가 왔다 갔다 한다는 그 자체도 뜬금없는 이유라서 이는 김경신과 김주원 사이의 왕위 다툼에서 김주원이 패배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의 난|김헌창이 여기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 보더라도 그 당시에도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여겨졌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당대에도 원성왕은 김주원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명주]]를 분봉하여 [[자치]]권까지 인정해주는 등 그를 달래기 위해 꽤나 애를 쓴 것을 보면 왕위는 차지했어도 김주원을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하지는 못한 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알천이 홍수로 불어난 내용은 일체 없고, 원성왕이 김주원보다 먼저 입궁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물】신라 김주원은 [[태종 무열왕|태종왕]]의 손자다. 원래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등|상대장등]](上大長等) [[원성왕|경신]]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즉위 전 김경신의 이야기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꿈]]에 [[복두]](고위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벗고, 소립([[삿갓]])을 쓴 채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녀|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점쟁이]]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점쟁이는 "복두를 벗는 건 [[벼슬]]에서 [[파면|쫓겨날 징조고]] 가야금은 칼을 쓰게 되는 것이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건 [[감옥]]에 들어갈 징조입니다."라는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은]] 해몽을 듣게 되어 [[멘붕]]에 빠진 채 [[히키코모리|집안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찬]] 벼슬의 '여산'(혹은 '여삼')이라는 사람이 김경신을 만나기를 청했는데 처음에 이를 만나지 않다가 재차 청하자 결국 만났다. 여산이 무엇이 고민이냐고 묻자 김경신은 일전의 꿈과 해몽 이야기를 했고 여산은 "그건 [[길몽]]입니다. 만약 한 자리 차지하고도 저를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해몽을 해 드리지요"라고 말하자 김경신은 주위를 물리치고 해몽을 들었는데 여산의 해몽은 이랬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거하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소립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손까지 왕위를 전한다'''[* 혹은 내물왕 12세손의 상징. 실제로 전자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았다. [[효공왕]]은 그의 7세손이며 [[경순왕]]은 원성왕의 남계 후손이 아니므로 논외. 12대손은 아니지만 본인 포함 15대가 이어지긴 했다.]는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징조입니다." 전에 점쟁이에게 들은 해몽과는 정반대였는데 해몽을 들은 김경신은 "위에 김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냐"고 물었고 여산은 은밀히 "북천(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따랐다. 이후의 이야기는 북천이 넘쳐서 귀족 회의에 김주원이 참석하지 못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이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를 무렵에 점쟁이 여산에게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산은 이미 죽고 없어 그의 [[자손]]에게 벼슬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