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성왕 (문단 편집) === 외왕내제 === 원성왕 때 신라 내부적으로 [[황제]]국처럼 행세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한 것이 많이 보인다. 제35대 경덕왕 때 건립되고, 제38대 원성왕 때 글이 새겨진 <[[갈항사]] 석탑기>(葛項寺 石塔記)에는 원성왕이 '경신태왕'(敬信太王)[* 태왕(太王)이 아니라 대왕(大王)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태왕과 대왕의 호칭은 황제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으로 그의 어머니가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적혀 있다.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에 세우시니라.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 모두 셋이 업으로 이루시니라. >남자형제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言寂) 법사이며 >큰누이는 (업이) 조문황태후님(照文皇太后君)씩이나 되며 >작은누이는 (업이) 경신태왕(敬信太王)씩이나 되시니라. >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旀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 >妹者敬信太王妳在也.)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46대 [[문성왕]]의 유언에는 [[헌안왕]](제47대)을 '선황(先皇)의 영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계이든 부계이든 헌안왕의 조상에서 왕이었던 사람은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계에 태종 무열왕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선 열조 원성왕이 유일하므로 '선황'은 원성왕이고, 원성왕은 황제로 불렸다는 주장이 있다. 그가 재위 기간 중 5묘를 만들고, [[왕권]] 강화를 했던 것으로 보아 황제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 몇몇 기록에서는 786년에 원성왕이 자신이 왕위를 뺏은 [[김주원(신라)|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그에게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다스리게 했는데 김주원과 그의 후손은 '명주군국'이라는 [[국호]]를 쓰며, 4대 37년간 명주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 이는 원성왕이 황제국에서 하는 것처럼 일종의 [[제후]]국을 둔 것인데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자 명주군국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들에 대한 [[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41e5ff7b7fef8eff#redirect|관련 논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