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세훈 (문단 편집) == 성장과 일제강점기 == 1887년 7월 10일 함경도 정평도호부 상선덕사 풍호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호중리)의 빈농가에서 원도경(元道京)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함경도 정평도호부 흥인사 연봉리(현 함경남도 정평군 독산리).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한학을 공부하다 1905년 [[중앙고등학교|융희중학]](隆熙中學)에 입학했다가, 1906년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한성의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안창호]], [[이동휘]], [[이상재]] 등과 청년활동을 이끈다. 1911년 비밀결사인 독립단을 조직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5달 동안 옥고를 치른다. 석방 이후 동만주를 거쳐 간도에 모록의숙을 설립한다. 간도 일본영사관이 체포령을 내리자 간도를 떠나 [[베이징]], [[칭다오]] 등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1917년 [[이동휘]], [[문창범]] 등 [[러시아]]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결성하자 원세훈은 재무부장을 맡는다. 1919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 국민 의회]]로 확대, 개편되자 원세훈은 재무부장 겸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얼마 후 대한 국민 의회와 [[상해임시정부]], [[한성정부]]와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자 원세훈은 대한국민의회를 대표해 상해로 파견된다. 이 자리에서 원세훈은 통합 임시정부를 만주나 러시아에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원세훈은 [[박은식]], [[김창숙]] 등과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한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원세훈은 창조파의 선두에서 [[상해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건립하자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고수파에게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해소되자 원세훈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원세훈은 [[김규식]] 등과 국민위원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1925년 [[소련]]과 [[일본]]의 비밀 협정에 의해 추방된다. 이때 약혼녀와 헤어지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 얼마 후 원세훈은 [[베이징대학]] [[노어노문학과|노문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안창호]] 등과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를 결성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7년 [[장쭤린]] 세력에 체포되어 [[평안북도]] [[신의주시]]로 압송된다. 이후 몇 차례 망명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한 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는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전향 압박이 심해지자 [[경기도]] [[평택시|평택군]]에서 은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