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후계자 선정에서 잘못을 했나? === 삼국지를 다루는 매체 중에는 가끔 '원소는 우유부단해서 장자인 원담과 총애하는 원상 중 어느 쪽도 확실하게 후계자로 정하질 못해 이후 세력 분열을 유도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틀리다.''' 우선 원소의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세력이 분열되고 결국 멸망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원소가 둘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정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와 후한서 모두 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지정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원담을 아예 가문에서 폐출시켜 원소의 혈육이 다 마르지 않는 이상 원담측에서 승작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놨다. 원소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원담을 가문에서 폐출해놓고도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를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원소가 원담을 폐출한다는 극단적인 행보까지 보일 정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대해서 사서상의 기록은 없다. 《후한서》에선 여양전투 직후 곽도와 신평이 원담을 부추기며 심배가 원소와 원담의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에 원담이 폐출되었다는 발언을 하고,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다고 여기며 원상을 습격하는 구절이 있는데, 심배는 원상을 옹립하며 사실상 섭정역을 맡았지만 애초에 원상파였다기보다는 원담과 오래전부터 앙숙이었고 원소 사후 원담의 승계를 차단하기 위한 명분으로 원상을 옹립한 것에 가깝다. 때문에 원상의 총애와 별개로 원담 폐출의 직접적인 계기 또한 최소한 하나 이상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제일 지지받는 추정은 원담이 청주를 통치할 때 엉망인 모습을 보여서 원소가 크게 실망하여 후계자에서 배재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설이다. 한편 원상을 굳이 후계자로 지목해 사후의 후계구도에 풍파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삼국지와 후한서는 모두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이라 적고 있고,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텐은 이에 대해 '멋쟁이의 후계자는 당연히 젊은 멋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미모만으로 후계자가 됐다는 사서들과는 달리, 원소 사후 권력기반이 극도로 불안정했을 때 이래저래 안좋은 모습을 보여준 원담과 달리 [[원상]]은 나이가 어림에도 상당히 분투하며 유능한 모습을 보였기에, 결과론적으로 미모만으로 후계자를 삼았다는 서술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재평가 여론도 있다. 원소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위엄이 있는 타입이라는 묘사를 볼 때, 굳이 아랫것들에게 후계자 선정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그래서 원소는 후계자로 원담보다 원상에 더 무게를 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문제는 앞서 말했듯 원담의 권력을 완전히 빼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담은 비록 원소의 실망을 사서 폐출당했지만, 군을 이끄는 지휘관, 장군으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문에서 폐출된 이후에도 중역으로 계속 남아있었다. 문제는 비단 삼국지 뿐만 아니라 역사의 어느 시대를 봐도 재능과 명분, 세력을 두루갖춘 장자가 왕위를 갖지 못하자 왕위계승자로 지정되었던 혈연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원소가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진짜 안전하게 원상에게 모든걸 물려주고자 했다면 원담(+원희)의 권력을 완전히 무로 만들어놨어야 했으며, 좀 비정하지만 그 상태로 어딘가에 유폐시키던가 아예 죽여버렸어야 했다. 요약하자면 후계자 선정은 시대상 장자에 대한 권위, '''그렇게 숙청을 잘하던 인물이 정작 후계자에서 배제한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 그 결과로 그 후계자의 기반을 위협할 세력을 조장시켰고 그 정리가 명확치 않은 상태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써 일을 크게 만들게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의 가문마저 일종의 장기말로 철저히 남들을 악용했던 냉혹한 원소가 원담을 숙청하지 않고 남겨두어 후계구도를 사실상 방치한 이유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뿌리를 바로 원소의 특유 단물 빨아들이고 버리는 전형적인 독재자 스타일 용인술로 해석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즉, 원소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일인 독재 체재를 완성하기 위해 후계자 또한 잠재적 경쟁자로 봤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므로 원담은 나이가 차고 군공도 있으니 잠재력 경쟁자로 봤고 늦둥이 아들은 비교적 컨트롤하기 쉬우니 바로 이런 차원에서 막내를 밀어줬을 수도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한편 이 관점에서 보면 동시에 영악한 원소는 원담을 폐출해도 끈끈한 원가 페밀리 테두리 안에 원담을 충성스러운 사냥개로 부려먹을 수 있다는 계산하에 숙청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근시적인 태도의 문제는 사냥개는 주인이 없으면 주변인들을 문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도 비슷하게 군재가 뛰어난 장자를 앞세워서 로마를 통일했는데 원소와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장자가 위험요소라고 판단되자 바로 숙청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의 장자는 뛰어난 군략으로 로마통일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지닌 유능한 차기 후계자였고, 그 반면 원담은 1주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무능력자이니 콘스틴티누스가 큰아들을 숙청한 것이 마이너스가 된 셈이 되었고 (특히 뒤를 이은 늦둥이 삼형제를 보면) 반대로 원소는 원담을 제때 숙청시키지 않아서 원씨 사이에 내전기가 들어서게 되었다.] 어쨌든 이는 원소의 부족한 배려심 때문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뚜렷한 한계가 결국엔 본인의 가문을 철저히 멸망시키게 되는 요소가 되고야 만다. 또다른 이유로는 상술되었다시피 원소에게는 핵심 인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랬던 것도 있다. 원씨 일족은 동탁의 손에 죽었거나 원술 편에 붙었거나 둘 중 하나인 이상 원담을 당장 죽이느니 써먹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추측의 영역이지만, 원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언젠가 원담의 날개를 꺾어놓고 원상을 후계자로 굳히려 했지만 급사하는 바람에 계획이 꼬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우선 원소가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죽은 것은 사실이다. 원소가 벼슬생활을 한 시기나 아들들의 나이, 6년상 시기, 조조와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나이는 끽해야 조조보다 몇살 많은 정도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낮게 잡으면 40대 후반 정도도 볼 수 있다. 즉, 죽을 당시 아무리 많아야 5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이 나이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군주로서는 한참 활동할 나이이며, 죽을 걸 대비해 후사를 급하게 준비해야 할 나이는 아니었다.[* 유비는 60대에 이릉대전을 지휘했으며, 조조도 60대 중반에 죽었고 손권은 70을 훌쩍 넘겼다.] 실제로 조조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가 살아있을 때는 조식을 총애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가 조조가 60대 초반 나이에 위왕에 오른 다음에야 조비를 확실한 후계자로 밀어주었다. 조조가 원소 나이 때 후계자 선정을 놓고 누굴 결정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직전까지 조식을 총애하다가 가후의 설득 덕분에 조비로 결정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소가 원담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던 것 처럼 조조 역시 조창의 군권을 빼앗지 않아서 조조가 죽은 후 조비는 조창을 의식해 절차를 생략하고 즉위 하루만에 처리했으며, 조창은 이에 포기하지 않고 조식을 찾아가 반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즉, 조조가 운 나쁘게 원소처럼 일찍 죽었다면 마찬가지로 후계자 자리를 확실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비의 경우도 마찬가지. 원담이 원소의 친자였으나 호적상으로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유봉은 반대로 유비의 친자는 아니나 호적상으로는 아들이었다. 친자가 아니었기에 정통성이 떨어지긴 하나 유선 또한 적자가 아닌 서자였기에[* 유선의 어머니인 감씨는 정실이 아니라 첩이었고, 유봉이 죽은 후에야 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충분히 후계를 노려볼 위치에 있었다. 또한 유봉은 원담과 마찬가지로 어린 동생이 아직 공을 세우기 전부터 군을 지휘하며 능력을 입증했고 형주공방전 이전까지는 큰 실책도 없었다. 만약 유비가 5년만 일찍 죽었다면 능력이 검증되지 못한 열한 살짜리 어린아이인 유선보단 군사적 성과를 보여준 유봉을 지지하는 사람도 나타났을 것이다. 허나 유비가 죽었을 때는 유봉은 이미 처형된 후였고 유선도 장성하여 후계 문제가 번지지 않았다. 즉, '원담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원상을 후계자로 밀어주지 못했다'는 것은 원소가 곧 죽는다는 것을 아는 후대인들 시선에서 본 것이지, 아직 한창인 원소 입장에서 굳이 장남을 처리하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부담이 큰 결정을 할 이유가 없다. 당시 원소와 조조는 '''전쟁을 막 마친 참이었고''', 조조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한 입장이었다. 아직 원소의 세력이 월등하더라도 조조의 부상은 분명 부담이 갈 수 밖에 없다.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지만 당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부하이기도 했다. 조조가 부담스럽게 목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명분 면에서 장남을 급하게 처분해버리는 무리수를 둘 이유도, 중요한 장수를 별 이유없이 처분할 이유도 없었다.[* 당시 원담은 원소가 지배하고 있던 네 개 주 중 하나인 청주를 담당하고 있었다. 애초에 청주자사로 부임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원소 세력을 이끌고 공손찬의 부하 전해를 격파, 청주를 점령한 일등공신이 바로 원담이다. 딴 사람도 아니고 조조랑 대치하는 와중에 이렇게 중요한 부하를 숙청한다? 지나치게 무리한 선택이며, 끽해야 50대 초반인 원소가 이런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곧 죽을 노인이라면 몰라도 원소는 분명 한창 나이였고, 조조나 유비도 그 나이에 급하게 후사를 준비하진 않았다. 만약 원소가 유비(향년 63세)만큼이라도 살았다고 쳐보자. 원상은 후계자로 임명된 시기부터 넉넉잡아 10년도 넘는 세월을 아버지의 후광 아래에서 입지를 키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실제 역사상에서처럼 1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급하게 지위를 계승하는게 아니라, 20대 중반의 나이로 충분한 입지와 실적을 쌓은 상태에서 즉위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력의 절대자인 원소의 비호 아래 명분과 실적을 쌓은 후계자라면, 단순히 장남이란 이유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꼭 이렇게 흘러갔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소가 평균 수명까지는 살았고 정말 원상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실제 역사보다는 후계자 문제를 훨씬 더 잘해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원소가 한 실수는 "자신이 병으로 일찍 죽을지 모르고 승계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정도인데, 이건 미래를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가 어리석었다고 보긴 힘들다. 위에 언급된대로 조조도 그 나이, 아니 그보다 더 늦은 나이까지 승계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예상 못하게 급사한 것 때문에''' 모든 게 엇나가게 됐을 뿐이다. 참고로, 원소가 맘만 먹었으면 충분히 후계자 문제를 정리할 시간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보통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참패하고 그 홧병으로 쓰러져 골골대다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사실 관도대전 패배에서 원소 사망까지는 약 2년 정도(200년 4월~202년 5월)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앞서 말했듯 원소는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였기에 그 기간 동안 정말로 몸의 이상을 느꼈는데도 억지로 후계자 문제를 무시하거나 내버려둔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