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군사적 능력 === >원소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조조|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랬을진대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땠겠느냐.''' >----- >[[조조]][* 관도대전 승리 후 조조 휘하의 관리들이 원소와 내통했던 밀서를 보고 이들을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는 간언에 대한 대답. 난세의 간웅이라 불리고 젊은 시절의 라이벌이자 자신과 비교했을 때 전혀 꿀릴 게 없던 강적을 꺾은 조조도 원소가 죽기 전까진 늘 원소를 두려워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답으로 직후 조조는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리라 명령하고 이 일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원소는 후한 말 군벌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비록 초기에 기주를 얻는 과정이나 공손찬을 기만하는 것으로 보면 병법이나 용병술보다는 정략과 모략으로 이룬 승리이지만 말이다. 원소는 군사적 성과는 동시대 군벌들 중 뛰어난 편이다. 원소는 불리한 정세에서 극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보인 인물이며, 관도대전 이전까지의 활약상은 조조와 비견될 만하다. 4개 주에 영향력을 떨치던 공손찬을 오히려 불리한 전황에서도 수차례 무찔렀고, 관도대전에서도 오소 이전까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전략적으로 조조를 완전히 몰아넣었다. 다만 사람들이 관도대전의 오소 습격 이후의 모습만을 기억해서 문제다. 거기에 원소와 그의 세력들은 관도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반란세력을 제압하는 등 여전히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소의 19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전적은 다음과 같다. * 191년, 공손찬과의 [[계교 전투]] 승리 * 같은 해, 흑산적 두장과의 업 전투 승리 * 같은 해, 흑산적 우독과의 척구전투 승리 * 192년, 업 근처에 주둔중인, 흑산적 유석군을 대파. * 같은 해, 광천에서 공손찬군을 대파. * 193년, 조조와의 연합. 발간에서 도겸군을 격파. * 같은 해, 흑산적 장연과의 흑산전투 승리 * 같은 해, 여포와의 연합. 상산에서 장연군을 대파. * 같은 해, 우독에게 본거지 업을 내주나 다시 싸워 승리. * 195년, 포구에서 공손찬군을 대파. * 196년, 동군에서 장홍군을 격파. * 197년 ~ 198년, 공손찬군을 대파하며 연승. * 199년, 역경에서 흑산적 장연군을 대파. * 같은 해, 역경에서 공손찬군을 전멸. * 200년, 중원의 패권을 두고 싸운 관도대전 발발. * 같은 해, 안량 · 문추, 조조와의 백마, 연진전투 패배 * 같은 해, 관도에서 조조군을 상대로 대패. * 201년, 기주 근처의 반란 세력 진압. * 같은 해, 창정에서 원소군 잔당이 대패. * 202년, 원소 병사 전적만으로 보면 그의 군사적 능력이 꽤나 준수했음을 알 수 있다. 반동탁연합 해산 시점까지 원소의 입지는 군사력이 아닌 여론의 지지뿐이었다. 즉, 명성만큼은 높았으나 실제 세력은 미약해 자력으로 군세를 유지할 역량조차 없이 한복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독자적인 군벌로 보기에도 애매한 군사력만 있었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군사력이 부족했던 원소를 지원했던 한복은 동탁에게서 원소에 대한 통제, 감시역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가 원소를 후원한 동기는 여론이 원소에게 있으니 그를 후원하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원소가 반동탁연합의 맹주로 추대된 것도 연합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였다. 그런데 반동탁 연합군은 소득 없이 해산되었고, 이 시점에서 한복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끌어들여 한복을 대파하고 그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원소는 한복과 공손찬을 싸움 붙여서, 한복의 주력이 공손찬에게로 향한 사이, 장양과 어부라 등 다른 기주 군벌들을 신속히 격파, 병합하여 군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물론 애초에 군세의 자력 유지가 불가능하던 상황에서 더욱 수를 늘렸으니 일단은 허장성세에 가까운 오합지졸이었다. 당황한 한복의 측근들은 원소를 열흘 안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했지만, 한복으로서는 얕보던 원소가 당장 저리 커버렸으니 원소에게 전력을 집중했을 때, 공손찬이 남하할 경우 결국 동귀어진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덕분에 원소는 '''한복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와서,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흔히 원소가 지닌 계략의 주도면밀함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나, 기본적으로 장양, 어부라의 신속한 격파, 병합이라는 군사적 능력까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원소는 계교전투에서 공손찬을 격파한다. 공손찬도 당대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기에, 금방 세력을 수습하여 재공세로 전황이 장기화됐다. 하지만 원소는 용주에서 또다시 공손찬을 대파해 기주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어진 장연과의 대결에서는 아예 근거지를 완전히 함락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심지어 장연이 장안 조정의 관리를 통해 지배 공고화에 들어간 상황에서, '''원소는 공손찬과의 전쟁을 막 마친 군세를 이끌고 귀환해, 성을 끼고 항거하는 우독의 1만 군세를 5일 만에 전멸시켰으며''', 다시 산을 타고 넘어가면서 험요지에 주둔한 군세를 상대로 공격을 거듭해 이들을 연이어 패퇴시키고는, 상산으로 쭉 올라가 장연의 본대까지 털어버렸고, 패주하는 장연을 추격하는 시점에서야 군사들이 퍼져서 물러났다. 이런 원소의 군사적인 업적들은 한복-공손찬-장연으로 연달아 벌어지는 불리한 대립구도에서 달성한 군사적 성공이다. 이후 원소의 대규모 군사 운용은 198년의 역경 공략 이전까지 확연히 줄어드는데, 이미 구 한복계는 저수를 제외하고 모조리 숙청되었으며, 공손찬은 용주에서의 패배 이후 유우를 격파하고 세력을 만회하려 했지만 유화를 앞세운 원소의 공작과 유우 잔당들의 봉기로 내상을 심하게 입어 그 자신은 역경루에 틀어박힌 채 각지에 파견된 자사들이 원소의 수하들에게 각개격파당했고, 장연은 패하여 그 많던 무리가 와해되었다는 기록뿐이지만, 수십 개에 이르는 연립세력의 맹주라는 특성상 장연 본대의 참패로 극심한 내부 분열을 피하기 어려웠을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점의 원소는 직접 대규모 거병에 나서 현장을 통제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기주는 그나마 안정되어 있어 다른 주들과 다르다는 저수의 발언(《후한서》 〈원소전〉), 원소 세력의 압도적인 물량 이미지 역시 결국은 초반의 연이은 군사적 대성공을 통해 통령체계를 빠르게 설립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손찬이나 원술 같은 인물들이 다스리던 영역에서 백성들이 굶어죽다 못해 인육이 횡행하는데도 더더욱 수탈에 열을 올렸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부도덕해서가 아니라, 싸울 때마다 전쟁에 지고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단지 군사력의 증강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자 그들 자신의 생명줄이 되어 선택지를 강요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친 도덕적 옹호라고 여길 수 있지만, 원술은 서중응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말로가 좋지 못할 것임을 이미 한참 전에 정확히 예견했으면서도 끝까지 학정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원술이 주색과 향략에 빠져 있던 것은 차라리 [[현실도피]]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며, 공손찬 역시 정신병적인 편집증 증세를 보였는데, 원술과는 방향성이 다르게 나타났지만 근본적인 동기 자체는 비슷할 것이다. 계교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할 당시 부장으로 종군하던 [[국의]]와 여포의 활약상이 부각되지만, 계교전투 당시 국의의 병력은 800명[* 단 국의는 한복 소속의 장군이었고 강족 전술에 능하다는 기술, 그리고 공손찬의 선발 기병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돌진해서 기병대를 역으로 헤집는 것을 보면 이 800은 단순한 800명의 징집병이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정예 부대였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고대 군대에서 대개 이런 집단은 강력한 유대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고 이 군대는 국의가 개인적으로 인솔하는 친위부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대에서 이런 군대는 정말 머릿수에 비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원소가 한 거 없이 국의가 혼자 다 싸운 것은 아니지만 공손찬과의 대결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은 국의였다.], 상산전투 당시 여포의 병력은 기병 수십 기로, 기록에 나타난 이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해 무력화시거나, 연속적인 기동으로 장연군의 전열을 교란하는 보조적인 활약에 그쳤다. 물론 국의와 여포가 회전에서 본대 싸움이 벌어지기 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은 맞지만, 이들을 기용하고 포진한 것 역시 지휘관의 능력이고, 애초에 회전에서 전세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여포와 국의가 아니라 결국 원소가 이끄는 본대의 역할이다. 사실 관도대전의 패배는 '''일반적인 전황이라면 절대 패배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그의 제왕적, 유아독존적 태도로 인해 유발되던 불합리와 휘하 인물들의 충성심 저하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오소 사건을 기점으로 선을 넘으면서 한 번에 터져나온 정치적인 문제가 크다. 군사적 능력 자체는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최소한 관도대전 당시에는 '''성질 급한''' 모습을 곧잘 보여주고 주의력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사실 원소는 조조나 유비 등 라이벌로 분류되는 인물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조나 유비 역시 말년에 거대한 전쟁을 유리한 위치에서 패한 적이 있다.(적벽대전, 이릉대전) 물론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나이는 저때 둘에 비해 훨씬 젊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사실상 말년이었다. 조조나 유비가 말년에 유리한 전쟁 크게 말아먹었다고 능력을 폄훼할 수 없듯이, 원소도 말년에 관도대전 말아먹었다고 그전까지 보여준 능력을 폄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리고 관도대전 이후 원소세력이 조조에 비해 열세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죽고 후계자 다툼 과정에서 망한 것. 또한 조조나 유비가 패한 전투도 본인의 실책 외에 상대(유비+손권, 손권)가 워낙 뛰어났던 것처럼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상대는 다름아닌 조조였다.] 일례로 원소는 연진으로 향한 조조의 의군에 낚여 본대의 도하 장소를 연진으로 설정하며 안량 등을 고립시켰는데, 원소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 기록에서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선봉의 포진은 안량, 곽도, 순우경 등의 정예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숫자상으로도 1만 이상의 대군이었으며, 지도를 살펴보면 연진에서 백마로 향하면서 조조를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 살펴보면 원소의 구상은 안량 등의 선봉대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그 사이 연진을 확실히 점거함으로서 혹시 모르는 배후 공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백마의 안량과 합류하며 안량을 치러 들어간 조조를 역포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조조의 의도에 낚여주는 척 일거양득을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장인 안량이 관우와의 일기토에 져서 참살당하고 관우로 인해 원소군 장수들이 모두 물러남으로 인해 물거품. 관도대전의 명운을 가른 오소전투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소가 넘어갈 경우 보급에 치명타를 받는 게 뻔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본진의 공세를 강화했으며 오소의 원군으로는 기병대만을 파견했다. 이 역시 기동성을 중시한 포진으로 조조가 순우경과 싸우는 사이 조조 본대의 후열을 박살내고 주력군이 빠진 조조군 본진도 정리하는 일타쌍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고, 이번에도 조조가 순우경군을 먼저 박살내면서 결과는 시궁창. 그나마 순우경의 경우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관우|원턴킬]] 났던 안량과 달리 '''조조 본인까지 피칠갑을 하는 처절한 싸움 끝에''' 간발의 차로 지긴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서는 정규군 10만을 동원한 장거리 원정이라는 군벌시대 당시로서는 유례 없던 일을 벌였던 데다, 내부적으로는 전풍, 저수 등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시키는 초강수를 두며 거창하게 원정을 시작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는 분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선을 끝까지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리자는 순욱의 진언은 원소군 지휘부의 내분 요소를 순욱이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사실 계교 전투에서도 본대와 떨어져서 앞서나가다가 다 이긴 판을 공손찬군의 역습으로 죽을 뻔한 전력이 있다. 공손찬 상대로는 특유의 뚝심과 과감한 역습으로 위기를 헤쳐나왔지만 관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결국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하는 상황은 계교전투 때처럼 정면돌파 해서 기세로 밀고 나가는 것 말고는 난관을 파해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조조의 오소 습격만 확실하게 막아내고 전세만 유지했어도 무조건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역전을 당할 수도 있는 본진 공격을 성급하게 지시하면서 사태가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세력 내부의 인사, 정치적인 문제가 터지면서 1선 사령관들의 배반으로 이어진다. 자아도취가 강한 원소의 성격상 화려한 승리를 얻고 싶었던 것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핑계로 지원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유비가 패망했다는 점을 들어서 고작 가족의 병 때문에 거병하지 않은[*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소규모 부대를 동원해서 황하 건너의 교두보 확보를 시도해 보긴 했다. 그런데 [[우금]]이 워낙 잘싸워서 역관광...] 원소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반박하는 측면의 의견으로는 원소가 서주와 유비의 지원에 그리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게 요지이다.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다.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원소는 수백리 앞에서 유비를 마중했다고 하는데, '''유비가 필요할 때는 거의 도와주지도 않던 인물이 정작 망하고 오니까 이러는 걸 보면 안면 철판도 대단한 수준'''. 유비 역시 이런 원소의 의도를 모를 리는 없었기에 원소의 객장으로 있으면서 은근히 세력을 모으고 자주 여남 쪽으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 가며 이동하면서 결국 원소에게서 벗어나 버렸다.[* 물론 겉으로 유비가 원소를 떠날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벽, 공도와 함께 유표의 지원을 받아가며 조조의 후방을 노리고 사보타주를 벌였지만 이게 망하는 바람에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던 것이니까, 원소도 어차피 명분만 취하면 유비에게 더 볼 일도 없었을 테니 가능했던 일이긴 했다. 뭐, 이유야 어쨌건 유비가 먼저 원소를 은밀히 떠나고자 했던건 사서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관우가 조조 휘하에서 안량을 참한 것도 있어서 떠나고 싶었을 테고. 무엇보다 한 황실의 중흥을 원소에게서는 절대로 바랄 수 없다는 점을 봤을 때 그 시점에서 빠지는 것이 정답이었다.] 한편으로 따지고 보면 한복의 기주목 양도를 위해 장양과 어부라를 격파, 병합해 세를 늘렸지만 장양,어부라의 병합은 물리적인 격파 자체보다는 교섭이 주된 이유였고, 그조차도 역시 실질적인 전력증강에는 일절 도움이 안 되는 한복과의 협상용 패였으며, 업성 탈환 역시 전과 자체로는 어마어마한 포스를 보이긴 했지만 결국 도승으로 대표되는 흑산적 두령들 사이의 내부분열과 이를 이용한 각개격파에 가깝고, 후기 공손찬과의 전투 역시 대대적인 선전공작을 통해 싸그리 털어먹은 뒤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을 형세의 우위를 통해 소모전으로 압살했는데, 어떤 의미로는 조조처럼 전투 자체에 강한 장군이라기보다는 정치, 전략적 개념의 연장으로 전쟁을 접하는 정치가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원소 자신은 자신이 참전한 모든 전투 중 계교전투를 가장 기적적인 대승[* 원소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은 196년에 헌제에게 쓴 상소문과, 197년에 공손찬에게 보낸 편지인데, 두 글 모두에서 자신이 참전한 수많은 전투중에서도 계교전투가 가장 기적적이고 값진 승리라 언급하고 있다.]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모략을 좋아하며 과감성이 없다는 평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국지적인 과감성은 보였을지 몰라도, 형세 자체가 극도로 열세해 사실상 회전을 강제당한 계교전투나 절묘한 판짜기로 조조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생각 외로 전선이 고착되면서 조급증이 극에 달한 관도대전 후반의 모습 정도를 제외하면 전투 자체를 통해 형세를 결정짓기보단 대체로 모략을 통한 형세의 우위로 [[양 웬리|이미 짜여진 각본 안에서 날로 먹는]] 전개를 선호했기 때문.[* 문제는 상대방이 그 짜여진 각본대로 춤을 춰 준다는 보장이 없고, 또 상대방이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경우 그에 대한 대비가 소홀했다. 게다가 날먹 각이 안잡힌다고 반대하던 전풍과 저수는 숙청해버렸으니 날먹이 될 리가(...).] 곽가는 원소를 평가하면서 일은 많이 벌여놓는데 요령이 없고, 결단이 늦어 후수를 두고, 허장성세를 좋아해 용병의 요체를 모른다며 극딜했는데, 아마 이런 성향의 단점일 것이다. 잘 풀리면 치밀한 모략으로 상대를 옭아매어 이미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결정지은 뒤 압도적으로 확인사살하는 전개가 나오지만, 안 풀리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군사적 결단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잃는 것 하나 없이 잔꾀로 해결하려다 결국 문제만 더 크고 복잡해지는 전개가 되기 때문. [[십상시의 난]]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애꿎은 양민들이 원소에게 학살당하고 하씨일족과 십상시 등 엮인 사람들까지 싸그리 죽는 수준을 넘어 결과적으론 나라 전체가 풍비박산났다. 원소 본인이야 그 와중에서도 이런저런 잔꾀를 부려 가문이 멸족당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오히려 명분과 여론의 지지라는 정치적 자산만 잔뜩 챙겨서 최대의 실력자로 자리잡았으니 궁극적으로는 손해라고 여기지도 않았겠지만. 그런데 희한하게도 후대에 이런 원소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평가한 사가가 별로 없다. 그나마 있는 것이 자치통감에서 관도전투 직후에 서술된 사마광의 평인데, 전술한 바와 같이 원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