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심창 (문단 편집) ===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 === 1930년 베이징에 가서 몇달간 머물다가 1931년 4월 상하이로 간 원심창은 지난해에 결성되었지만 유명무실했던 남화한인청년연맹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그해 6월에 가맹한 뒤 재북경동북의용군후원회 등 항일단체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고, 1931년 10월부터 서기를 맡아 각종 정보와 연맹원에 대한 보고 및 연구회의 개최를 담당하는 한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정책을 실현 및 확대 강화를 위해 적극 활동했다. 또한 그는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격문 또는 선전문을 제작, 배포했다. 1931년 8월 29일에 [[한일병합]] 21주년을 맞이해 남화한인청년연맹 명의로 "8월 29일은 조선민족이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된 날이다. 분발하여 적의 아성을 추부수자"는 내용의 격문을 1백매 등사하여 상하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1932년 5월 1일에는 노동절을 즈음해 노동절의 의의와 무정부주의 내용을 담은 선전문 약 1백매를 제작해 상하이 조선인들에게 우송했으며, 1933년 3월 1일엔 3.1절을 맞이하여 "일본제국주의를 저주하며 모든 사유재산제도와 권력을 파괴하고 무정부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려는 취지로" 쓴 선전문 70매를 등사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조선인에게 우송했다. 한편, 남화한인청년연맹은 무정부 사회건설을 위해 행동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은 원심창 등 남화한인청년연맹원 뿐만 아니라 대만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인 등으로 조직된 국제적 테러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의 지도자로 부임하여 1932년 12월 16일 [[유기석]] 등에게 상하이의 일본 주둔군 병영과 일본 총영사 관저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폭탄은 예정된 대로 폭발했지만 위력이 떨어졌기에 건물 일부만 파괴시켰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제 관원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3월 중순경, 원심창은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만주 포기를 종용하기 위해 국민당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백정기, 이강훈 등과 함께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시도했다. 그들은 3월 14일 연회장소인 육삼정을 답사하고, 원심창은 3월17일 육삼정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폭탄과 권총을 백정기에게 건네주고 최종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실행 직전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거사는 불발에 그쳤다. 다음날 아침, 상하이와 베이징, 난징 등 각 신문에 일제히 이 암살계획이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 테로단’이라고 크게 대서특필돼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원심창 등은 7월 10일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원심창과 백정기는 무기징역형, 이강훈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백정기는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고 1934년 6월 5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는 원심창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 동지는 몸이 건강하니 자중자애 하라. 자네가 출옥한 후에도 만일 독립이 안 됐으면 나를 조국 땅에 묻지 말고, 독립이 됐으면 나의 유해를 조국 땅에 묻어주어 무덤위에 꽃 한 송이만 꽂아주기 바란다. 그 후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원심창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뒤 1945년 10월 10일에 석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