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심창 (문단 편집) === 해방 후 경력 === 감옥에서 풀려난 원심창은 귀국선을 타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조국에서 신국가 건설운동에 참여하고자 했고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신탁통치하는 것에 반발해 반탁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신탁통치의 찬반으로 대립이 심화되자, 그는 귀환한 지 3개월 만인 1946년 2월 초 일본으로 도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재일한인사회의 안정과 수습에 진력했고 신조선건설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당시 재일한인사회에서 대세를 모으고 있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재일본조선인연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에 친일인사들이 참여한 것 역시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조선건설동맹은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함께 "신탁통치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등 반탁운동을 적극 전개했으며 1946년 8월 15일 [[8.15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성명과 기본 강령을 새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행동 강령에는 '민족통일선전'의 구축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원심창의 심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조선건설동맹은 재정과 지방조직의 취약성 때문에 조직체가 잘 정비되지 못했고, 이때문에 독자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결국 원심창 등은 1946년 8월 31일 동맹청년학교에서 개최된 제2회 전체대회에서 재일한인의 생활을 보호하고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거류민단'을 조직한다는 안건을 결의하고 신조선건설동맹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거류민단 결성대회는 10월 3일에 개최되었다. 2천 명이 참석한 결성대회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기획부장 김용태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의장에는 고순흠, 부위원장에는 홍현기와 원심창이 각각 담당했다. 또한 원심창은 거류민단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거류민단은 곧 재일본조선인연맹과 격렬한 대립을 벌였고, 원심창은 거듭된 분쟁에 지칠대로 지쳐서 1948년 3차 전체대회에서 이강훈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다가 1949년 4월 제6회 임시대회에서 부단장으로 복귀했고, 1951년 4월 3일 제11회 임시대회에서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4월 3일 제12회 전체대회에서는 김재화, 김광남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해 거류민단을 이끌었고, 10월 3일에 개최된 제13회 전체대회에서는 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원심창은 국내의 정당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아나키즘을 내세우는 독립노동당에 참여해 1947년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에는 독립노동당 일본특병당부를 결성했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1951년 4월 거류민단 단장에 선임된 그는 거류민단 산하에 전재원호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인들에게 구호 물자를 전달했으며, 좌우합작으로 동화신용조합을 창설했다. 이후 그는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을 촉구하며 재일한인사회의 통일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55년 1월 17일 <매일신문>을 통해 통일 방안을 밝혔다. >첫쨰, 조선의 통일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민족의 대국에 서서 대동단결을 할 것. >둘쨰, 통일중앙정부는 남북 조선을 통한 자유총선거에 의해 옹립할 것. >셋째, 자유총선거와 조선의 통일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 그러나 원심창이 속해 있던 거류민단은 원심창의 통일 촉진운동에 우려를 표했다. 거류민단은 "통일은 좋으나 본국(대한민국)이 거부했으니 우리도 거부한다."고 하여 남북통일운동준비를 반대했다. 그러나 원심창이 듣지 않자, 결국 거류민단은 그를 제명 처분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통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5년 1월 30일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전국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했다. 원심창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중앙대표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뒤이어 전문위원회 섭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곧 한계에 부딪쳤다. 그들은 1955년 6월 25일에 '6.25 기념평화제'를 3.1절 행사처럼 전국적인 행사와 평화데모를 치르려 했지만 거류민단과 재조선인연맹의 저조한 참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북한이 1955년 8월 15일에 남북통일촉진협의회 대표를 초청하자,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삼무국장 원심창을 비롯해 권일, 박춘금, 정인훈, 남호영, 이희원 등 6명을 파견하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일본에서 3일간 8.15 해방 10주년 기념행사를 거족적으로 치루려 했지만 재조선인연맹의 방해로 끝내 제대로 기념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결국 거듭된 훼방에 의욕을 상실한 인사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원심창 만이 남북통일촉진협으회에 계속 남아 명맥을 이어갔다. 그는 1959년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반대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영근과 함께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해 대표상임고문을 맡아 평화적 자주통일운동을 추진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설치하고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통일운동을 지속했다. 이렇듯 한국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71년 7월 4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 그의 유해는 [[도쿄]] 이카루노시 훗사역 근처 다이교지에 매장되었다가 1976년 10월 2일 철원군으로 이장되었고,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원심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아나키스트]][[분류:원주 원씨]][[분류:평택시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7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