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조비사 (문단 편집) == 사료적 가치 == [[실위]]는 [[칭기즈 칸]] 때나 돼서야 [[문맹]]을 벗어나 통일 국가를 이뤘다. 《원조비사》는 칭기즈칸이 죽고 난 뒤에 쓰여진 사서로 칭기즈 칸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현재 몇 안되게 남아있는 몽골측 사료이다. 칭기즈 칸이 생전에 자기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 있으나 근거가 부족하다. 칭기즈 칸은 [[피휘]]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이런 방면에 전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몽골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에도 피휘 풍습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몽골 역대 대칸들의 이름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사용되었다. 다만 피휘라기보다는 아마도 존경심 때문에 몽골 역사에서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과 쿠빌라이 칸의 이름 "쿠빌라이" 딱 두 개의 이름만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사료로서의 가치는 학계에 알려진 초반에는 다른 기록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 진실성에 의심을 품고 신화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구가 깊어지면서 다른 사서들과 교차 검증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더 깊은 내용까지 등장할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다른 사서들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승리가 사실은 패배였다는 점이나 칭기즈 칸 개인의 약점들인 [[벡테르]] 살해[* 벡테르가 테무진의 (예수게이의 적자로서 가진)권위를 위협한 건 사실이지만 [[호엘룬]]이 꾸짖었듯이 어쨌든 테무진은 형제를 죽였다.], [[보르테]]의 납치, [[주치]]의 출생 문제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다른 사서들과는 차원이 다른 칭기즈 칸 연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또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역사라는 점 외에도 [[유목민]]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라서 유목민의 역사 연구에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다. 《원조비사》라는 사서의 존재가 [[몽골]]과 [[중국]]을 넘어 [[서양]]에도 소개된 것은 [[19세기]] 무렵에 들어와서의 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그 존재가 서양 학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이러한 경위가 있기 때문인지 세간에는 《원조비사》가 [[1980년대]]에 와서야 [[영어|영문]] 등으로 번역되어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이름의 "비사"라는 말이 붙었다는 설도 돌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문 번역도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고, "비사"라는 제목도 책 제목에서부터 내부 항목에까지 떡하니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 [[한문]]으로 적혀 있다.[* 물론 이 제목은 명나라 때 붙여진 제목이라 볼 수 있으므로 원래 제목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에 붙여진 제목은 절대 아니다.] [[분류:몽골의 도서]][[분류:몽골의 역사]][[분류:몽골 제국]][[분류:몽골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