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종(고려) (문단 편집) === 재위 기간 === ||<-2> '''{{{#670000 등극한 고종 안효대왕(高宗 安孝大王)의 아들}}}''' || || '''{{{#670000 24대}}}''' || '''{{{#670000 강제 등극}}}''' || || '''원종 순효대왕''' || [[영종(고려)|안경공]] || 원종이 즉위할 무렵은 그 길었던 [[무신정권]]의 황혼기로 62년 우봉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천출 출신 [[최의]]가 살해되고('''무오정변''') 새로운 실권자인 [[김준(고려)|김준]]이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사실 원종이 몽골에 입조하고 있을 때 [[고종(고려)|고종]]이 붕어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위험할 뻔했는데 대몽 강경파인 김준이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안경공 왕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종의 유언에 의해 [[고려]]에 남아 있던 태손 왕심(王諶)이 임시로 왕위를 대신했다.[* 왕심은 외할머니가 권신 [[최우]]의 딸로서 원종 사후 [[충렬왕]]으로 즉위했다.] 결국 이듬해에 왕전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돌아와서 정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은 강안전(康安殿)[*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있던 본궐의 편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 밀교의 세례식이다.]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 >후에 황의(黃衣)[* '치황의'나 '자황포' 중 하나로 보인다.]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관리들.]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 당시 태손은 충렬왕 왕심이다. 아직 태자로 승급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태손'으로 불렸다.], 공(公), 후(侯), 백(伯)[* 고려의 봉작제는 이분화되어 있었다. 신하의 5등작, 왕족의 3등작인데 여기선 왕족의 3등작을 지칭한 것이다.], 재추(宰樞)[*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을 지칭한다.]와 고위 문•무 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만세(萬歲)를 외쳤다. >---- > - 《[[고려사]]》 <원종 순효대왕 세가> 재위 원년([[1260년]]) 4월 중. 1268년 [[임연]]과 함께 공모하여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었던 김준의 목을 베고 그 일족들을 처단했다('''무진정변'''). 그러나 1년 후인 [[1269년]]에는 [[태자]] 왕심을 몽골로 입조토록 하여 친몽[[정책]]과 [[개경시|개경]] 환도를 시도하다가 김준 살해 후 새로운 무신 집정자가 된 임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때 잠시 [[임금]]으로 즉위한 인물이 바로 이전에도 차기 계승자로 한 차례 거론된 바 있었던 [[안경공]] 왕창이었다. 밀려나버린 원종은 안경공을 앞세운 임연에 의해 [[태상왕]](太上王)에 봉해졌고, 강화도에 있는 별궁 용암궁(龍岩宮) 명화전 숭녕부에 유폐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기사정변'''). 그러나 마침 고려로 귀국하는 도중에 있었던 태자 왕심이 이 소식을 듣고 몽골로 돌아가 [[쿠빌라이 칸]]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결국 쿠빌라이 칸의 압박으로 원종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로 가서 직접 쿠빌라이 칸과 만나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고, 동시에 몽골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 [[황족]], 즉 [[황금씨족]] 출신의 황녀와 태자 왕심과의 혼인을 추진하게 되며, 개경 환도를 시도하게 된다. 때마침 임연이 근심으로 인한 병으로 죽고, 새롭게 무신 집정자가 된 임연의 아들 [[임유무]]를 그의 측근인 [[홍문계]], [[송송례]]를 회유하여 결국 죽이는데 성공하고('''경오정변'''), 마침내 100년간이나 지독하게 고려 왕조를 좀먹었던 무신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이후 귀국과 동시에 개경 환도를 하게 된다. 다시 왕위를 되찾았을 때 원종은 자줏빛 옷을 입고 있다가 노랑색 [[곤룡포]]를 입고, 고려 정궁에서 [[신하]]들로부터 하례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북방의 [[평양시|서경]]에서는 [[최탄]] 등이 1269년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개 성을 들어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대원'이라는 중국식 [[국호]]를 쓴 것은 1270년이다.]에 투항하고 말았는데 이 때 원나라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할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원종은 이를 돌려달라고 계속 쿠빌라이 칸에게 요구했으나 쿠빌라이 칸은 이를 듣지 않아 결국 원종이 죽을 때까지 이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 지역은 1290년 충렬왕 시대에 돌려받았다.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근본적으로 무신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가 고려 정부의 친원정책에 반발하면서 결국 [[배중손]]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군|진도]]와 [[제주도]]로 계속 근거지를 옮겨가며 원나라와 고려 왕실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들은 왕족 [[승화후]] 왕온을 즉위시키고, 서해와 남해안을 전전하며 막강한 해상 세력을 구축했고, 고려를 거점으로 한 [[일본]] 원정에 쓰일 함선을 파괴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 함선들이 자신들을 토벌할 때 쓰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원나라의 [[홍다구]]와 고려의 [[김방경]]을 위시한 [[여몽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이후에는 일본 공격 방침을 세운 쿠빌라이 칸의 요구로 고려는 일본 원정을 위한 대[[함대]]를 만드는 데 국력을 쏟아부었으며, '결혼도감'을 설치해 원나라로 가는 [[공녀]]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극에 달했다. >짐(朕)[* 원종때까진 아직 '''[[외왕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이 박한 덕으로 [[종묘|종조(宗祧)]]를 지킨 지가 15년이 되었다. 그러나 부담이 막중하여 병에 걸리니,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 >이르건데 대보(大寶)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내(予) [[충렬왕|원자(元子)]]는 원랑의 덕성으로 인망을 얻으니 명철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다. > >지금 [[원나라|상조(上朝)]]에 있어 직접 명(命)을 받지 못했지만, 무릇 너희 신민(臣民)은 사왕(嗣王)의 명을 받들어 전령(前寧)의 위대함을 잃지 말라.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해 3일안에 끝내라. 산릉(山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해야할 것이다. 번(藩)[* 제후의 땅을 '번'(藩)이라고 한다. 원종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하고, 제후의 번(藩)을 통솔하며, 자신의 유언을 '[[조서(명령)|조]]'(詔)라 하여 [[천자]](天子)로서 붕어했다.], 진(鎭), 주(州), 목(牧)은 자기 영역을 넘어오지 말고 조정(朝廷)의 지시를 따르라. 과거, 혼인 등은 멈추지 말고 그대로 하라. > >아! 너희 보상대신(輔相大臣)과 월궐서사(越厥庶士)[* 나라 밖의 선비들. 즉 몽골 출신 관료들을 말한다.]들은 지나치게 슬퍼하다 다치지 말고 모든 심력(心力)을 다해 [[고려|방가(邦家)]]를 보호하고 안정시켜라. >---- > - 《고려사》 <원종 세가> 중, 원종의 유조(遺詔). 고려의 마지막 '유조'(詔)이다. 이후 충렬왕부턴 '유교'(敎)라 해서 제후의 제도를 따른다. 실로 고려 왕조가 몰락으로 향하던 시기로 원종은 이를 지켜보다가 1274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고려의 정식 묘호인 '종'을 쓴 마지막 [[군주]]가 되었는데 이후 아들인 충렬왕부터 제30대 [[충정왕]]까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모두 '''충'''(忠) 자를 붙이게 되었다. 고종과 원종은 처음에는 원나라의 시호를 안 받고, 자국 시호만 올렸지만 이후 제26대 [[충선왕]] 2년 때 원나라가 '충경왕'(忠敬王) 시호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수백년 후 조선의 [[철종(조선)|철종]]이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역시 '충경'(忠敬)이었다. 다만 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추존되면서 청국 시호를 폐지했다.] 원종의 아버지 고종에 대해서도 '충헌왕'(忠憲王)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보내 상•하 종속 관계를 확실히 하려 했는데 원나라가 시호와 더불어 추증한 관작은 >'단성봉화보경량절강제좌리공신(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 - 태사(太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 - 상주국(上柱國)' 이었다. [[태자]]가 [[세자]]로 바뀐 것도 원종때가 시작으로 '''다수의 [[왕실]] 예법이 격하된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이렇게 [[제후]]국으로 격하된 칭호들은 이후 600년이 지난 1894년 [[갑오개혁]]때에 와서야 되돌려진다. 고려는 왕실의 칭호뿐만 아니라 [[귀족]]의 작위도 [[오등작]]을 썼었고 관직명, 국가 기관 명칭 등 내정 제도 전반을 [[황제]]국급으로 썼었지만 원종 이후로 전부 왕국급 혹은 그 이하로 격하되었다. 이후 칭호와 관제 등은 제31대 [[공민왕]] 때 다시 복권되었고, 이후 [[조선]] 초기에 조율을 통해 다시 하락되기도 했다. 5등작도 복원됐다가 조선 [[태종(조선)|태종]] 때 다시 없앴고, 묘호 제도도 조선 내부에서 폐지론이 자주 나왔지만 그것만은 계속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