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종(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원종 치세는 치욕일 수도 있는 [[원 간섭기]]를 연 시대였다. 그런데 [[고려]] 말이나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를 보면 원종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것을 넘어 호의적이다. >'[[무신정권]]을 수습한 [[군주]]이고 당시 [[몽골 제국]]의 세력이 강했는데 치욕을 감수하고 [[나라]]의 보전을 꾀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라는 식의 평가가 대부분이다. 사실 호평이고, 악평이고 전부 무신정권의 종료라는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사대부]]들은 위로는 고려 초기 [[문벌귀족]], 뒤로는 [[권문세족]]과도 연결고리가 있기 때문에 무신정권 시기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고, 이를 무너뜨린 군주는 고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에 항복한 부분이 커버되는 것도 결국 무신정권이 붕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자력으로 무신정권을 끝내지 못하고, 몽골의 힘을 빌렸다는 점은 비판받았다. 실제 《[[동국통감]]》에서는 원나라와의 화친은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나, 나라를 위협하는 [[권신]]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실권이 없었다는 변명만 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버지 [[고종(고려)|고종]]의 경우에는 '''무오정변'''을 통해 원나라의 입김과 상관없이 권신 [[최의]]를 제거하며 우봉 최씨 세습정권을 없애버렸다.[* 이것도 고종의 역할은 거의 없었고, 무신들끼리 [[내란]]을 벌인 끝에 [[김준(고려)|김준]]이 자신의 일파와 함께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고종이 김준에게 최씨 정권을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이를 방증한다.] 때문에 원종은 무오정변이 터지고 난 이후에 남아 있는 무신정권 잔당들을 [[삼별초의 난]] 이전에 없애지 못했고, 원나라의 편에 기대어 제거했다며 비판을 받았다.[* 쉽게 말해 외정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으나 내정에서는 고종보다 못 미친다는 평가이다. 이 점은 소현세자도 비평론자들에게 비슷한 평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안경공]] 왕창의 경우, 폐위되어 그렇지 만약 원종 대신 치세를 유지했다면 [[북벌]]론을 주창한 강경파 [[효종(조선)|효종]]처럼 됐을 [[확률]]도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고, 효종 역시 자신의 입지를 위해 말로만 북벌론을 외쳤던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당대 [[세계]] 최강대국인 몽골 제국과 장기전을 벌였음에도 직할 통치를 면한 점 자체는 인정해줘야 할 부분이다. [[쿠빌라이 칸]]이 약속한 '''불개토풍'''(不改土風)으로 고려는 고유 풍속을 유지하고, 자치 [[국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쿠빌라이 칸의 유지[* 하다 못해 [[쿠빌라이 칸]] 대신 다른 계승자인 [[아리크부카]]를 지지했다면 작게는 고려 [[왕실]], 크게는 [[한반도]] 자체의 존망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운]]이 따라준 감은 있지만 그의 줄서기는 그냥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를 이후의 몽골 대칸들도 바꾸지 못했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 몽골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바꾸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바꾸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몽골 제국은 고려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그 지방의 풍습을 대체로 인정해주었으며, 서아시아의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 같은 경우는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이슬람]]을 [[국교]]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는데 [[왕조]]의 입장을 제하고 나면 고려가 특별 대우까지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왕조를 살려둬서 이후 고려 [[국왕]]이 쿠릴타이 회의에 원나라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씨 [[황실]]의 일원으로 참가까지 한 것은 큰 대우이다. 덕분에 초창기 횡포를 부리던 [[다루가치]]들도 이후에는 [[부마]](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국이 된 고려 국왕에게 큰 소리를 못내게 된다. 원종 또한 치욕임을 알았으면서도 전란으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하기보다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유리한 조건에서 몽골 제국에 복속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 고려가 계속 몽골 제국에 항쟁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훌레구 칸]]의 몽골 서정군이 [[중동]]을 쓸어버릴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할 때 바그다드 시민들은 대량 [[학살]]당했다. 몽골이 휘저었던 [[동유럽]]에 살던 [[유럽]]인들이 세대가 지나도 당시 몽골을 코즈믹 호러급 [[괴물]]들로 묘사하는 것을 보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계속 항쟁했다가 고려도 그 꼴이 났을 수 있었다.] 사실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최씨 무신정권 주도하에 벌어진 대몽항쟁의 실상]]은 최씨 무신정권이 [[안전]]한 강화도에 앉아서 조세나 강탈해가고, 본토의 백성들은 조세는 조세대로 뜯기며,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약탈]]당하고 학살당하는 것이 일상사였던 참혹한 시기였기 때문에 강화를 맺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태조 [[칭기즈 칸]] 이후로 몽골 제국은 반항하는 나라를 [[개발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무신정권의 수뇌부들 역시 몽골군에게 나라가 점령당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몽항쟁]] 시기에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도망간 뒤에 사치스럽게 놀았어도 동시에 몽골군을 격퇴하는데 골몰하는 등 할 일은 했으며, 상황이 [[중과부적]]이라서 끝내 몽골 제국에게 패배했지만 무신정권도 [[전쟁]]에 대해 손을 놓지는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최씨 정권의 [[만행]]이 비호되지는 못하는데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짱박혀 [[군대]]를 보내거나 [[산성]]이나 [[섬]]으로 피신하라고 전하는 등 직접적인 움직임은 하지 않았으며, 본토에서는 백성들이 몽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영토]]가 초토화되는 그 순간에도 최씨 정권의 수뇌부들은 저택을 짓고, [[향락]]을 즐기기에 바빴다.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몽골의 1차 침입 때 중앙군이 몽골 전초 부대의 기습에 붕괴되었기 때문에 전투를 하고 싶어도 할 주력 [[병력]]이 없었으며, 남아있는 건 최씨 [[가문]]의 사병들뿐이었는데 [[사병]]을 운용해 몽골에 저항하다 반대 세력의 뒤통수를 맞고 싶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 간섭기와 관련해서는 결과적으로 [[원나라]]에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자치권만은 지켜내며 고려의 위상을 세우려 노력한 임금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인지 이후 조선의 명군 [[세종(조선)|세종]]은 고려 [[태조(고려)|태조]](제1대), [[현종(고려)|현종]](제8대), [[문종(고려)|문종]](제11대), 원종(제24대)은 백성에게 공덕이 있는 국왕들이니 종전대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또한 '''원종은 고려를 원형대로 유지하려 애쓰기도 했다'''. 《[[고려사]]》 <원종 세가>에 따르면 원나라의 압박이 거세지는데도 불구하고, 황포를 입었으며, 9묘제 태묘(太廟)를 재설치했다. 태묘([[종묘]])에는 5묘제와 7묘제(9묘제) 두 가지가 있는데 5묘제는 묘호가 없는 [[제후]]식 종묘였고, 7묘제는 묘호를 올리는 [[천자]]식 종묘였다. 원종이 [[묘호]]를 받은 것은 적어도 자신 대까지만은 고려의 종묘 예법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원종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고, 신하들에게 표문을 받는 등 현상 유지에 노력했다. 친원파 세력들이 >"왕세자를 본받아 우리도 몽골풍 옷을 입읍시다!" 라고 하자 왕은 >"난 절대 조가(朝家)의 풍속을 못 바꾸겠으니 내가 죽고 나면 해보든지 그래" 라고 거절하기도 했다.[* 《고려사》 <충렬왕 세가> 즉위년 기록.] 이후 [[충렬왕]]은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면서 몽골풍 옷, 즉 호복을 착용했고, 이를 본 많은 고려 사람들은 울면서 한탄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