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효 (문단 편집) == 평가 == > "<대승기신론>은 대승을 본질로 한다. 그것(대승)은 텅 비어 고요하며, 깊고 그윽하다. 그윽하고 또한 그윽하지만 어찌 만상(萬像)밖을 벗어난 것이겠으며, 고요하고 또한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 허나 만상 밖을 벗어난 것은 아닐지라도 5안(眼)으로도 그 형체를 능히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4 변(辯)으로도 능히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 > '크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적은 것(無內)에도 충분히 들어가며, '작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큰 것(無外)도 충분히 감쌀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을 '존재'라고 하자니 진여도 그것으로 인해 공이 되고, '비존재'라고 하자니 만물이 그것을 통해 생겨난다. > 그것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니, 굳이 말로 하자면 '대승'이다." > ---- > [[대승기신론소]], 원효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승려'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사실 불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항한 [[잇코잇키]]나 [[니시혼간지|혼간지]]로 유명한 일본의 [[정토진종]](또는 일향종一向宗)도 원효의 책 유심안락도(遊心安楽道)의 영향하에서 세워진 종파다.[[https://vpoint.jp/opnion/interview/131411.html|#]]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3번 절했다고 써져 있다. 불교에서 [[붓다|3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요)|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00210175011329&p=hani|@]][* 한때 이보다도 200년 앞선 판본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도 나왔으나 오보로 판명되었다.[[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26|#]]]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 [[산스크리트어]](범어)로는 Dignāga, [[한자]]로 뜻을 풀이하여 (대)역룡(大)域龍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고대 [[천황|덴노]]의 시호들을 일거에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원효의 손자인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薛仲業)이라는 사람을 발견하자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원효 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읽고 감동했는데(嘗覽元曉居士所著金剛三昧論) >그 사람을 보지 못해 깊이 아쉽거늘(深恨不見其人) >이제 그 후손과 만나니 기쁘도다(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해야지(乃作詩贈之)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 나머지는 고려 중기의 선승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고려 후기의 승려 야운이 지은 <야운자경서(野雲自警序)>.]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 <[[고려사]]> 악지에도 "가사에 범어(梵語)가 많아서 싣지 않는다." 하며 소개만 하고 가사를 빼버렸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원효가 범어나 범자를 알고 있어 노래 가사를 지을 정도였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원효가 신라 국내파임을 고려하면 당대 신라 불교계의 교육 역량이 범어 교육에도 미쳤음을 보여준다. [[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SD&m201_id=10063621&res=y|참고:삼국시대에 이미 범어 연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논문]] ]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지 200년이 지난데다, 1명이 추던 것이 12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3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 같고 목은 여름 [[자라]] 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학술적 의미에서 설명하자면, 국내에서 원효를 주제로 쓴 박사 논문이 160여 편이 넘는다. 원효의 연구범위는 현세구복적 불교에서 논리학적 불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의 수준 역시 동아시아의 최첨단을 달리는 내용들. 고려시대에도 [[숙종(고려)|숙종]], [[의천]], [[김부식]], [[이규보]], [[일연]] 등 인물들이 언급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신라 중기의 불교 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불|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신라)|의상]]의 화엄종이다. 이처럼 불교 이론가, 교종으로서의 면모가 매우 큰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대중화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인물인데, 민중에게 있어 '불교의 경전은 이해가 어려우니 그런거 너무 신경쓰지 말고 생활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라. 나무아미타불만 잘 외면 된다'는 내용으로 대표되는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생활 불교인으로서의 면모도 상당한 인물이다. 나무아미타불을 사실상 '발굴'한 것도 그의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비롯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