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월미도 (문단 편집) == 역사 == 월미도와 관련한 이름은 [[1655년]] [[효종]](조선) 때 기록인 <비변사등록>에서 확인된다. 당시에는 魚乙未島(어을미도)라고 불렸다. 그 뒤 숙종 때부터 月尾島(월미도)로 쓰여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655년에 어을미도에 행궁을 지었는데 공사를 해야 해서 돈이 더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1708년에 상소문 중 적이 와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강화도는 이미 [[여몽전쟁]] 당시에 수도로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막혔을 때를 대비해 월미도까지 행궁을 만들고 피란로를 만들자고 하였다. 그리고 월미도와 [[인천광역시|인천]]은 해상군사요충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여기서 조선 중기부터 이미 월미도가 군사 요충지로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쯤부터 어을미도에서 월미도라고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개화기]] 때에는 [[러시아 해군]]의 [[석탄]] 창고와 [[일본 해군]]기지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열강들이 이곳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별였다. 대표적인 예로 [[병인양요]] 때 이 섬을 점령한 [[프랑스 해군]]은 지휘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따 로즈 섬(Roze Island)이라고 했다. [[1900년]] 월미도의 개간권을 허가받은 송정섭[[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d_A1852_1_0031390|#]]은 일본인 요시가와에게 개간권을 팔아 넘겼고, 요시가와는 월미도 주민을 내쫓았다. 조선 정부는 송정섭을 체포하고 매각 대금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고 개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요시가와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04년]] [[8월]]에 일본군이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쌓았으며, [[1905년]] [[5월]]에는 민가 80여 호를 철거하고 섬 전체를 점거하였다. [[1923년]] 1㎞의 제방을 쌓아 육지와 연결한 후 유원지로 개발되었는데,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조탕[* 潮湯, 바닷물을 끓여 데운 목욕탕이다.], 별장, 요정, 해수풀장[* 바닷물로 만든 풀장.] 등이 들어섰다. 북한에서는 월미도를 '영웅의 섬'이라고 부르며 '월미도 정신'이라는 구호까지 만들어 월미도를 각별하게 생각하는데 북한정권의 선동자료에 의하면 6.25 당시 전황이 불리하여 후퇴를 할 상황에 놓이자[* 인천상륙작전 때문이란 말은 안나온다.] 최고사령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요충지인 월미도에 사수를 명령한다.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인민군 해군]] [[해안포]][[중대]]는 최고사령부의 지시를 목숨처럼 여기며 3일 동안 결사항전을 하였고[* 두 눈이 멀은 와중에도 포를 장전하던 해병, 몸을 피신하라는 말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죽어가는 와중에도 전화선을 연결했던 여군통신병 따위의 영웅적 묘사가 나온다.] 전원 사망으로 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벌어준 3일 덕에 북한군은 전력을 재정비하여 전승에 기여했다..[[구라|는 이야기인데]], 실상은 [[유엔군사령부|UN군]]은 단 수십분 만에 월미도를 접수했고 북한 해군육전대는 120명 전사에 190명 투항의 피해를 입은 반면, 연합군은 1명 전사 22명 부상에 그쳤을 정도로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줘팬 전투였다. 영웅적 설화는 당연히 거짓으로, 당시 자료 화면을 보면 알몸차림으로 손을 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북한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 월미도 정신에 관한 일화는 북한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큼 국가적으로 내세우는 프로파간다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통째로 거짓말이었다는것을 믿지 못하는 탈북자들이 많다고 한다. 해방 후 이 섬에는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대한민국 해군)|제2함대]]가 들어서게 되었고 1999년까지 사령부가 월미도에 있었다. 이 중 월미산 일대 해군 주둔지는 [[평택시]]로 이전하며 인천시에 부지를 반환했고 인천시는 부대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이 공원이 현재의 월미공원이다. 공원 내 2함대 주둔지였음을 뜻하는 기념구조물이 있다. 휴전 이후에 1960년대까지도 월미도는 육지와 제방으로만 이어진 섬이었으나 1970년대 들어서 제방 주변의 바다를 [[간척|땅으로 메우고]] 이 자리에 공장과 항만시설을 지으면서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됐다. 1980년대 들어서 월미도 해안 주변에 놀이동산이 들어서면서 수도권의 대표적인 해양 관광지로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 월미도 놀이동산의 바이킹과 디스코 팡팡이 주목을 받으면서 월미도의 인기가 수직상승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