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역사 == ||<#cdfbb5,#699751> 200년 ||[[관도대전]]|| ||<#cdfbb5,#699751> 213년 ||[[조조]]가 위공으로 책봉됨 || ||<#cdfbb5,#699751> 216년 ||조조가 위왕으로 책봉됨 || || 220년 ||[[조비]]가 황제로 즉위 / 위나라 건국[* 사실상 위나라는 조조가 위공이 되면서부터 개국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건 공국, 왕국이고 조비는 제국을 열었기 때분에 여기에 표기하였다.]|| || 227-234년 ||[[제갈량의 북벌]]|| || 249년 ||[[고평릉 사변]]|| || 254년 ||[[조방]]의 친위 쿠데타 발각 || || 260년 ||[[조모(삼국지)|조모]]의 친위 쿠데타 실패 || || 263년 ||[[촉한]] 정벌|| || 265년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 / 위나라 멸망 || 조위는 조조가 후한으로부터 위공(魏公)의 봉작과 [[구석]]을 받으면서 공국(公國)으로 건국되었다. 그리고 216년 조조가 위왕(魏王)의 봉작을 받으면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본래부터 조조는 후한의 [[승상]]으로서 후한의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왕국을 건국하고 후한과는 완전히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일본의 막부 정권이 교토의 천황 조정과는 별도의 정부를 구성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 후한 조정의 위상은 완전히 실추된다. 조위가 왕국의 체계를 갖춘 이후 후한은 명목상으로는 존속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형식만 남게 돼버렸다. 조조가 죽은 뒤 조비가 조위의 왕위를 잇는다. 그리고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껍데기만 남은 후한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천자의 제국으로 건국되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조비가 죽은 뒤 조비에 이어 [[조예]]가 제위에 올랐다. 처음에는 [[조진]]과 [[조휴]] 등 황족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으나 조진은 얼마 못 가 죽고 조휴는 [[석정 전투]]에서 대패하여 [[분사]]하였다. 조예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조위는 직계 혈통이 끊어져버린다. 게다가 조예가 [[양자(가족)|양아들]]로 들여서 새로 황제가 된 [[조방]]의 혈통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이 실추된다. [[사마의]]가 공적을 세워 조위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자 조예는 죽기 직전 조진의 아들인 [[조상(삼국지)|조상]]에게 실권을 주어 조씨 황실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정권을 빼앗겼고, 조조와 조비 대의 공신들의 후손들이 사마씨로 갈아타면서[* 조모가 시해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침과 함께 진의 예를 제정한 [[순욱]]의 아들 [[순의]], 조위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가규]]의 아들 [[가충]], 그 외 [[진교]]의 아들 [[진건]], [[악진]]의 아들 [[악침]], [[배잠]]의 아들 [[배수]], [[왕창]]의 아들 [[왕혼]] 등 많은 개국 공신 후손들이 이때 조씨를 버렸다. 이들은 순욱을 주축으로 한 영천 호족 청류파 집단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는데, 순욱이 조조에게 버림받은 만큼 조씨 일가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들이 조씨를 배반하는 것도 어찌보면 사필귀정이다.]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조위 역시 천하를 한두 해 다스린 것은 아니고, 나라가 그렇게 까지 막장으로 치달은 것도 아니였고, 사마씨 세력 역시 위나라의 모든 신하를 다 손에 넣은 건 아니었다. 조위 말기에 사마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이나 음모는 [[조방]], [[관구검]]과 [[문흠]], [[제갈탄]], [[이풍(조위)|이풍]], [[조모(삼국지)|조모]]의 친위 쿠데타 등으로 손꼽아보면 적지 않게 많고 그 규모도 작지는 않았고 제갈탄의 난 당시에는 아예 오에서 원군이 오기도 했고 [[강유]]도 그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들이 따로 놀게 아니라 손을 잡고 대규모로 거병을 일으켰다면 삼국시대는 길어질 망정,적어도 서진은 탄생하지 못할수도 있었다.하지만 이런 '반사마씨 세력'이라고 해서 어떤 통일성이나 연결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황제가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계를 한것도 아니라 손에 손을 맞잡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지는 못하고 그저 중구난방으로 단독으로 거병하거나 몰래 음모를 꾸미는 것이 고작이었다.거기다 지지기반이 부실하거나 내부에서 불화가 발생하기도 했고 이들의 역량도 사마씨에 크게 못 미쳐서 사마씨에 대항하는 반격 계획은 번번히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이를 명분으로 하여 사마씨는 반대 세력을 [[숙청]]할 수 있게 되었고, 조위 황실의 명운은 점점 깎여나가게 된다. 조방은 사마의가 죽고 두 아들들인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가 정권을 잡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허무하게 실패하고 자신이 폐위당하고 만다. 조방을 제거한 사마사는 그의 사촌 동생인 [[조모(삼국지)|조모]]를 데려다가 제위에 올렸다. 조모는 형 사마사가 죽고 동생 사마소가 정권을 잡자, 역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사마씨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오히려 '''백주대낮에 사마씨의 군대에 시해당하고 만다.''' 사마소는 아예 꽤나 먼 황족 [[조환]]을 데려다가 제위에 앉힌다. 이로서 황실은 완벽하게 사마씨의 꼭두각시화되고 조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촉한]]이 사마소에 의해 멸망[* 정확하게는 [[등애]]가 멸망시켰다.]한 지 불과 2년이 지난 후, 마지막 황제인 조환이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선양을 하면서[*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위세를 올려서 [[선양]]을 받을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허울만 남아있던 조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황제들이었던 조방과 조모, 조환의 최후는 조조와 조비에게 밀려난 후한 헌제의 처절한 모습과 매우 흡사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좋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얌전히 퇴위를 한 조방과 조환은 후한의 헌제처럼 서진 조정으로부터 나름 대우를 받으며 안락하게 살다가 천수를 다했지만 조모는 대놓고 신하들에게 시해당하여 이는 훗날 서진 왕조의 대의명분 상실과 '''이후에 벌어질 [[남북조시대]]의 선양 피바람의 시초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황제가 되기 전 작위가 '''진류왕'''이었고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이 폐위 후 받은 작위가 '''진류왕'''이었다.] >평하여 말한다. 고대에는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직 현자들에게 주었다. 후세에는 왕위를 세습하여 적자를 후계자로 세웠다. 만일 적자가 없으면 방계 친족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가령 한나라의 [[문제(전한)|문제]]와 [[선제(전한)|선제]]가 그러했으니, 이는 바꿀 수 없는 법칙이다. 그런데 [[명제(후한)|명제]]는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사사로운 애정을 중시하여 어린아이를 어루만지며 기르고,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전해주었고, 또 적합한 인물에게 위탁의 책임을 맡기지 않고 일족을 정치에 참여시킨 결과 조상은 주살되고, 제왕 조왕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고귀향공 조모는 재간이 있고 총명하며 어린 시절에 완성을 보았으며, 의론을 좋아하고 문장을 애호하여 문제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류왕(조환)은 정사에 관해 묻지 않고 재상이 정치를 하도록 하고 한위(漢魏)의 전례를 받들어 [[진(사마씨)|진(晉)]]에게 양도하였다. 그래서 진나라로부터 대국(大國)으로 봉해지고, 진 왕조의 빈객이 되어 산양공(山陽公; 후한의 헌제 유협)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 >《위서 삼소제기 진류왕기》의 마지막 평론 조위가 망한 후, 선양을 받은 사마씨는 이전에 받은 작위에 따라 나라의 이름을 대진(大晉)이라 했는데, 오늘날에는 역사 속의 다른 진(晉)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서진]]이라 부른다. 서진의 황제들은 위나라의 전례를 밟지 않기 위해 같은 사마씨 일족들의 힘을 키워주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지만, 후한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개선되지 못한 채 통일제국을 건국하였고, [[팔왕의 난|그 이후의 결과는 망했다.]] 수도는 선양 직후에는 후한의 마지막 수도 허([[쉬창|허창]])를 그대로 썼으나 곧 [[뤄양|낙양]]으로 [[천도]]했다. 여담으로 황제들이 재위 기간이 끝날 때의 나이가 나중 대로 갈수록 더 어려진다는 희귀한 징크스를 가진 제국이었다. 문제 조비 41세 붕어, 명제 조예 35세 혹은 36세 붕어, 소제 조방 23세 폐위, 폐제 조모 20세 붕어, 원제 조환 20세 폐위 등. 사실상의 초대 군주인 무제 조조 역시 66세에 붕어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묘한 징크스이고, 이렇게 점점 단명하는 황제들이 조위의 황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