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정치 == [[진군]]이 주창한 '''[[구품관인법]]'''이 만들어졌다. 대개 위나라 시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변화라면 이것을 꼽으며, [[세계사]] 교과 시간에 후한 말기나 중국 삼국시대에 넘겨짚고 가는 역사적 업적도 사실상 이 제도 뿐이다.[* 이것 이외에 그나마 세계사 시간에 언급해볼만한 삼국시대의 내용은 [[황건적의 난]]과 장로의 [[오두미교]]를 중심으로한 도교문화의 발달, 손오 정권에 의한 남방 개척, 최초로 호 단위로 거둔 것 정도를 꼽아볼 수 있다. 오히려 삼국지의 내용은 역사시간 보다는 한국 고전문학이나 한시, 고사성어 등에 간간히 인용되어서 공부하게 될 때가 더 많을정도.] 위나라 관료들은 크게 조씨의 가향인 [[초]], [[패]] 출신자와 여(여남), 영(영천) 출신자가 많았다.[* 위진남북조사, 이공범.] 본질적으로 위나라는 강력한 군벌인 조조가 [[연주(중국)|연주]], 영천, 여남 일대의 호족들을 포섭하고 지지를 받아내어 건국한 나라다. 삼국지연의는 물론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조조 휘하의 모사나 무장으로 묘사되는 인물들도 사실은 대개 지역 호족들이다.[* 사실 '''삼국지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다 이렇다.''' 유비 세력도 미축 같은 경우는 서주출신 호족이었다. 이러다 보니 위오촉 전부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가 있고 그 안에 호족출신 신하들이 있는 구도였다. 이런 원인은 한나라의 체제와 후한말에 있는데 한나라의 체제는 황제, 외척, 환관으로 구성된 중앙권력과 호족 출신 사대부 관료로 구성된 지방권력이 있는데 문제는 후한 말에 들어 외척과 환관의 대립이 격해지다가 끝내 환관이 승리하고 외척은 호족출신 사대부, 즉 청류파와 협조적이었지만 환관은 그렇지 않았기에 [[당고의 금]]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막아버렸다. 이렇게 중앙권력에서 배제당하게 되자 호족들은 자기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고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 등으로 거의 중앙정부가 붕괴되다시피하자 이렇게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킨 호족들이 군벌화 혹은 그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조나 손견-손책-손권 라인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이렇게 놓고 보면 위오촉을 세운 조조, 유비, 손권은 이 군벌들의 난립 끝에 살아남은 최종 승리자인 셈.] 애당초 [[조인]], [[조홍]], [[조휴]]를 배출한 조조의 고향 초의 조씨 집안부터가 호족 집안이며, [[하후돈]] 등을 필두로 하는 하후씨 일족이나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뒷날 위를 무너뜨리는 서진 정권의 기반을 구축하는 [[사마의]]의 사마씨 역시 호족이다. 구품관인법의 정비로 [[관료제]]가 발달하여 관리 서열의 [[상하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되었다. 하지만 구품관인법의 중정제가 일으킨 부작용으로 [[호족]]의 귀족화가 나타나게 되고, 귀족의 대두로 정치가 귀족들에게 좌우되기 시작한다.[*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는 모두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세 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호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진 이후로 지배층으로 군림하는 이른바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이 바로 이 시기의 호족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귀족화된 계층이다. 위의 가장 큰 약점은 황통으로, 실제 위나라의 황통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뒤늦은 후계자 책봉[* 217년에야 공식적으로 조비가 후계자로 정해졌는데 이 때 당시 조조 나이는 62세이며 죽기 불과 3년 전이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한 219년에 유선을 세자로 세웠고 이 때 유비 나이가 57세였고 손권은 장남 손등을 221년에 세자로 세웠는데 이 때 손권의 나이는 39세였다. 유비야 뒤늦게 기반을 마련했으니 공식적인 후계자 선정은 늦어졌다고 할 수 있고 손권 또한 오왕에 오르고 얼마 안가서 후계자를 정한 반면 조조는 위왕이 되고도 1년이 지나서야 후계자를 정한거다. 그것도 자기 나이가 60이 넘어 당시 기준으로 내일 갑자기 쓰러져 죽어도 이상할 거 없는 나이임에도 말이다.]과 이후 머지 않은 조조의 사망 때문에 [[조비]]는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우들을 매우 의심하여 직계 황족들을 시골의 봉지에 연금시켜 사실상 감금 상태로 만들어놓았다. 이후 조예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황실의 혈통이 위기를 겪었으며 황제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가져왔다. 조예도 아버지쪽 혈통에는 문제가 없는데다가 대외적으로 알려진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비의 아들인건 확실했기에 별문제가 없었는데 조방은 어느날 갑자기 조예가 양자로 삼겠다고 데려온데다 그 가계조차 알려져 있지 않아서 조예의 친자가 아닌건 둘째치고 '''조씨 출신이 맞느냐'''부터가 불분명했다. 물론 조예도 어머니쪽 문제는 있었다. 심지어 조예도 조비의 친자가 아니라는 풍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하는 틈을 얻을 수 있었다. 후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환관]]과 [[외척]]을 척결하려는 시도도 진행되었다. 조조는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이들을 밟아놓았고[* 조조 세력의 중심들이 한창 젊을 때 환관과 외척에 의해 나라가 패망한 경험을 겪은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외척은 천한출신으로 삼았고 조비는 이를 이어받으며 아예 제도면에서 환관의 직책을 제한하고 태후에게 정치를 아뢰지 말라는 법을 비롯해 외척세력의 발흥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본인들 뿐만 아니라 한나라 황제의 외척들을 상대로도 숙청을 저질렀다. 다만 후일 환관이 등장해 국정을 농단한 촉한 정도는 아니었어도 환관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잘라냈다고 하는 위나라에서도 [[조상(삼국지)|조상]] 일파와 밀접히 결합해 연락하면서 국정을 주무른 [[장당]]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조상이 왜 중서령을 안 거쳤느냐 하면 손자, 유방 일파가 완전히 자기 사람이 아니라 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마사가 하후현과 [[이풍(조위)|이풍]]을 주살할 때 보면 하후현전에서 종육이 상주하길 이풍과 그 일당이 환관과 결탁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후 조방이 폐위된걸 보면 환관이 권력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보기 힘들다.[* 사실 중요 사대부에 대한 처벌만 기록되어 있으며 '환관 따위 처벌에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외척의 경우도 조방이 [[사마사]]를 죽이기 위해 장인 [[장집]]과 조예의 딸 [[제장공주]]의 시아버지 이풍과 모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위는 스스로의 제도를 어기고 황실의 권력을 위해 외척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게 드러난다. 결국 어느정도 권력이 강성할 때는 외척과 환관 배척의 원칙도 강하게 내세우겠지만 불안정해지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겠다. 거기다가 사마씨는 태후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위의 태후를 협박해 황제를 갈아치웠다. 사실 촉과 오 역시 외척의 발흥은 없었다. 외척 문제는 삼국시대 바로 후에 발생하는데, 후한시대의 외척문제 때문인지 조위는 노이로제 수준으로 외척을 배척하였고, 그 조위를 계승한 서진은 반대로 황족, 외척을 중용하였다. 위나라의 패망을 보고 반면교사를 삼은 듯 한데, 근데 그들의 중용 때문에 서진은 멸망테크를 타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중국사/등용 제도|위진이 구품관인법이나 '종친 중심의 등용'을 개혁책으로 내놓았지만 그 결과물은 영 좋지 못했다.]] 위나라의 구품관인법은 귀족체제의 공고화와 더불어 그 자체도 무력화되어 [[과거제]]로 변모되기까지 폐단을 낳았고 [[진무제]]와 그 뒤를 이은 [[진혜제]]가 정신줄을 놔버린탓에 종친 중심 등용체계는 그냥 [[주나라]]의 [[봉건제]]나 [[전한]]의 [[군국제]]만도 못한것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주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수순을 밟았듯이 위나라는 사마씨에 의해 멸망, 진나라는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으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