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차가타이 칸국 ==== 카슈가르는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만 유명했던 것이 아니었다. 카슈가르는 고대 말부터 [[네스토리우스파]] 대주교구가 존재했을 정도로 기독교가 번영했던 도시로, 이 지역의 소그드인들과 위구르인 기독교도들은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웅구트 등 여러 몽골 부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카슈가르를 장악한 카라한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호탄의 불교가 수피 이슬람으로 대체되는 와중에도 카슈가르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슬림 튀르크인들과 공존하며 수백년동안 계속 번영하였다. 카슈가르를 1273~4년에 여행했다는 마르코 폴로에 따르면 당시 많은 수의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주민들과 여러 교회들이 번성했다고 한다. 13세기 말 [[차가타이 칸국]]의 투글룩 티무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도 이슬람을 강요하기 시작한 듯 하다. 흑사병의 창궐과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이라크 이주 이후 이웃한 기독교 공동체와 소통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카슈가르를 약탈하며 교회들을 파괴하였고,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사멸했다. 1390년 [[차가타이 칸국]]의 히즈르 호자는 [[키타이]]에 대항하는 지하드를 벌여 위구르스탄의 중심지인 투르판과 코초를 정복하고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즈르 호자는 중국인에 맞서 싸운 것도 아니었으며 위구르의 불교 주민들은 그의 주장과 다르게 정복 이후 수십년에 걸쳐서야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위구리스탄 주민 전부를 개종시켰다는 주장과 다르게 이들은 15세기 초 불교 승려를 대동한 사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으며, 1420년대 이 지역(당시에는 [[모굴리스탄 칸국]] 영토였다.)을 거쳐간 티무르 제국의 사절은 이 지역에서 다신교(불교) 사원들이 엄청 화려하고 수도 많다고 기록했다. 1450년대 즈음 돼서야 이 지역에 모스크가 많다는 기록이 나오기 시작한다. || [[파일:4D25A3F1-2D33-4BB6-B258-905006FD460A.png|width=100%]] || || 오늘날의 [[위구르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바로 같은 차가타이어파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인데, 이는 카라한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에 의한 신장의 이슬람-튀르크화와 관련이 있다. || 차가타이 칸국을 계승한 [[티무르 제국]] 치하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 각지에서는 차가타이어 문학 및 천문학 등이 융성하였다. 티무르 제국과 동쪽에 이웃한 [[모굴리스탄 칸국]] 주민들은 같은 차가타이어를 사용하는 사마르칸드의 차가타이 튀르크인(이들은 [[우즈베크]]들의 선조에 해당한다.)들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미 카라한 칸국 시절부터 타림 분지 서부 주민들은 여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따르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동튀르키스탄 주민들은 서부의 차가타이 튀르크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모굴리스탄 동부의 불교를 믿는 주민들은 주변 교역 파트너들이 하나둘씩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상황에서, 이들도 불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 원나라 왕족들이 위구르계 주민들을 다스리던 불교 왕국인 카라 델 왕국은 [[하미시|하미]]를 수도로 삼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16세기 초까지 잔존하고 있었으나, 1513년 [[모굴리스탄 칸국]]의 만수르 칸에게 정복당해 멸망당했다. 명나라는 하미를 탈환하기 위해 몽골족 한 개 부족을 통째로 고용하는 등 비싼 비용으로 대군을 동원하며 맞섰으나, 결국 망신만 당하고 실패하였다. 하미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을 원치않은 이들은 명나라에 요청해 난민이 되어 감숙성으로 이주하였다. 명나라 간쑤성으로 피신한 위구르인들은 2~3세대가 지나며 서유구르어를 잃어버리고 현지 중국인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동튀르키스탄 주민 중 불교 신도들이 순니파 하나피파로 개종하는 동안 [[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타슈쿠르간]] 등지의 산악지대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파미르족]] 주민들은 시아파 중에서 소수종파였던 [[이스마일파]]로 개종하였다. 시아파 이스마일파의 경우 [[노루즈]] 같은 조로아스터교 풍습을 권장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구르인들 중에서도 시아파로 개종한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타림 분지 동부의 일부 주민들은 [[시아파]]의 수피 교단 중 하나인 [[알레비파]]로 개종하였다. 알레비파는 하나님과 무함마드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알리]]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특이 종파로서, 영지주의 및 텡그리 신앙의 영향을 흡수한 수피 교단으로 순니파 이슬람과 교리 및 율법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른바 [[https://en.m.wikipedia.org/wiki/%C3%84ynu_people|에이누인]]이라 불리게 된 위구르족 알레비파 신도들은 여타 동튀르키스탄의 순니파 무슬림 주민들과 충돌한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 한가운데서 유목을 하거나 아니면 집시처럼 잡상인이 되어 도회지에서 유랑하는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이 동튀르키스탄을 장악했다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완전 이슬람화한 이후, 청나라의 통치 시기 동안 위구르인 인구가 늘고 장작 수요가 늘어나자 '''신장의 많은 고대, 중세 불교 유적들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당시 불교를 미신으로 경멸[* 청나라 조정의 만주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존중했는데, 한족 지식인과 관료들은 그 반대급부로 불교에 내심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한족 지식인층이 불교에 무관심해진 영향도 있었지만 지배층인 만주족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교를 경멸하는 경우가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지식인들이 조선 사절들에게 위구르인을 소개하면서, “이들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 같은 미신을 믿는다.”고 경멸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하던 청나라 관료들은 무슬림 주민들이 '''비료로 활용하기 위해 불화를 긁어내서 쓴다던가''' 사찰 유적의 나무를 가져다가 땔감으로 쓴다던가 같은 행위를 방조하였고, 이로 인해 신장의 불교 유적 상당수가 건조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이 지역의 불교 유적들이 20세기 서구인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불교가 중국에 도래한 역사가 재조명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