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구르/역사 (문단 편집) === 티베트 불교와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 === 15세기에 이슬람 수피 교단의 일파였던 낙슈반디야 교단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수피 스승이 제자에게 사후에도 영향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며 교단주의 영향력을 절대화했으며, 수피승들은 더 이상 산 속이나 사막 한가운데서 묵상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샤리아]]를 엄격히 준수하도록 만들어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며 과거의 수피 성직자들과 다르게 정치에 적극 관여하였다. 다시 말해서 수피 교단 지도자가 정치에 대놓고 개입하였다.[* 은둔과 고행을 강조했던 기존의 수피 교단과는 다르게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에서는 수피 교단의 지도자가 직접 나서서 [[샤리아]]가 엄격하게 적용되도록 국가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참고로 이렇게 수피 교단이 정치성을 띄게 되는 현상은 낙슈반디 교파 뿐만 아니라 특유의 [[비밀결사]]스러운 철저한 내부적 조직문화 때문에 수피즘의 역사에서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당장 원래는 수니파 다수였던 현대 이란 일대를 시아파로 개종시키고 현대 중동의 수니-시아파 대립의 지정학적 구도를 만든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만 하더라도 원래 수피 교단이었던 자흐디야, 차후 [[사파비야]]교단이 아예 교주-제자 관계를 세속적 주종관계로 확대시키며 교단 자체가 하나의 왕조국가로 성장한 경우다.] 당시 타림 분지는 [[모굴리스탄 칸국]]에서 갈라져 나온 동모굴리스탄 칸국과 [[야르칸드 칸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다스리던 차가타이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을 지도하며 차가타이 칸국의 실권을 장악한 호자 가문[* 호자 가문은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후손이라고 선전했으나 진실은 저너머에...]이 칸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호자 가문의 구성원들은 곧 칸국의 권력을 놓고 아파크 호자가 이끄는 "백산당"과 이스하키 호자가 이끄는 "흑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고 여기서 아파크 호자의 백산당이 패하면서 아파크 호자는 남쪽 [[티베트]]로 도망쳤다. 아파크 호자는 [[라싸]]로 가서 티베트를 다스리던 [[달라이 라마 5세]] 아왕 롭상 갸초에게 백산당이 다시금 동모굴리스탄 칸국의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달라이 라마 5세의 겔룩파 티베트 불교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리와 비슷하게 "종교 지도자들이 세속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새로운 교리로 무장하며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동모굴리스탄 칸국이 차가타이 가문의 대가 끊기자마자 곧바로 낙슈반디야 교단주들이 직접 지배자로 올라선 것과 비슷하게, 아왕 롭상 갸초 역시 자신을 밀어주던 호쇼트 몽골의 구스리 칸이 사망한 이후 구스리 칸의 자식들을 밀어내고, 자기 자신이 직접 티베트의 정교일치 지배자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종교는 다르지만 삶의 방향이 흡사한데 따른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달라이 라마 5세는 아파크 호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가르 칸국]]의 갈단 칸에게 아파크 호자를 도와 동모굴리스탄 칸국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 때 티베트 불교 승려로 수행했던 갈단 칸은 이를 칼같이 받아들여 1678년 12만 명의 대병력으로 타림 분지 서부를 침공하여 백산당과 연합, 흑산당을 몰아냈다. || [[파일:28B2E967-C0A2-4648-A02E-2BE3CA796585.jpg|width=100%]] || || 승려 출신이던 갈단 칸은 환속 후에도 항상 삭발 상태를 유지하고 다녔다 한다. 티베트인 호위병, [[카자크]] 사절과 같이 있는 갈단 || 갈단 칸은 아파크 호자와 그의 후손들을 달라이 라마 5세의 윤허 하에 타림 분지의 칸으로 임명한 후 준가르 칸국의 봉신으로 삼았다.[* 쫓겨난 흑산당은 이후 아파크 호자와 백산당을 배신자로 선전했으며 지금의 위구르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아파크 호자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준가르 토벌을 명목으로 한 중국의 개입을 불러일으켰기 때문. 또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빌붙었다는 점 때문에 위구르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슬람 교리는 초창기 부파 불교와는 약간은 융화가 가능해도 티베트 불교와는 융화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이와 별개로 신장 현지에서는 통치를 그럭저럭 했기 때문에 아파크 호자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며 [[카슈가르]]에 있는 아파크 호자의 묘는 중요 문화재로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갈단 칸은 1680년 [[야르칸드]]를 약탈하던 키르기스인들을 격파하고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요새와 오아시스 농장을 건설했으며, 카자흐 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준가르는 1705년 모굴리스탄의 뒤를 이어 [[야르칸드 칸국]]마저 멸망시켰으며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역이 준가르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준가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타림 분지의 각 도시들은 매년 은 12만 냥에 해당하는 공물을 준가르의 칸에게 바쳐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